서울시 주최 국제학술대회
이순신 서울에서 만나다 를 시작하겠습니다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리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저는 오늘 사회를 맡게 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박희용입니다
이런 역사학자들의 큰 모임에
저는 건축역사학자인데요
이 자리에서 사회를 볼 수 있게 돼서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참석해 주셨는데요
혹시 뒤에 자석이 부족하거나 하면
저희가 스태프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으니까
말씀해 주시면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80주년과 강복 8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준비한 오늘 국제학술대회는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의 석학들이 참여하여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이자
백의종군이 출발지였던
서울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인간 이순신이라는 삶의 국제적 이상을 조망해보고자
기획한 학술 행사입니다
오전에는 기조 강연과 한 분의 발표가 있겠고
오후에는 여섯 분의 발표와 종합토론이 진행될 예정에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기조 강연으로 시작을 할까 합니다
기조 강연은 마크 피터슨 미국 브리거명 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
충무공 이순신 개인적 성찰,
국민적 찬사,
국제적 존경이라는 주제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마크 피터슨 교수님은
브리거명 대학교에서 학사를 받으시고 하버드대학교에서요
동양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저널 편집장과 아시아학회
내 한국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시기도 했습니다
오늘 강연도 한국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로 발표를 준비해주셨습니다
마크 피터슨 교수님을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한국말로 할까요
미국말로 할까요?
나는 미국말은 오히려 편해요
근데 한국말을 좀 준비해 놨는데
어떻게 제가 이순신 개인적 상처,
국민적 찬사 또한 국제적 존경이라고 하는데
세 가지를 제가 말씀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아는 것 무엇일까요?
그 말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조금 아는 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족보,
족보 관계는
저는 그분의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혹시 제 유튜브를 보셨다면
이런 장면을 보셨을 거예요
이것은 제 소재에 있는 장면인데
제 스튜디오 저 뒤쪽에 그 가운데는 뭐 있죠?
저기 항상 저 옆에 있는 독수이시 족보 세보
이거 제가 독서 논문 썼을 때
독수이시 이순신하고 누구?
이율곡 선생 관계 연구를 좀 해놨습니다
그 족보는 이렇게 보신다면
아주 멋있게 아주 훌륭한 족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장면은 이이입니다
여기 이 장면은 이순신입니다
서로 여기 독수이씨 책임자들 대표해서 계시는 거 아는데
이... 222일곱 선생하고
중고공 이순신은 서로 19촌입니다 19촌
그런데 촌수가 많으면
나이가 안 되는 거 있잖아요
이순신은 나이가 더 어리고
그런데 아저씨입니다
이순신은 조카입니다
22는 조카입니다
동시에 살았는데
이율곡 선생도 나이도 많고 했지만
서로 많은 일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느 때 누가 이순신 보고
너의 조카 이유리
선생이 교수를 갖고 있는데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이순신 씨가 안 만난다고 왜?
벼슬 가진 사람이 있고
만나면 무슨 혜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어서 안 한다고 해요
그만큼 이순신 씨가 아주 깨끗한 관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족보를 제가 석사 논문 썼을 때
그분의 선조와 그분의 후손과 연결을 해놨습니다
또 여기 이순신의 이름
아주 명백하게 나옵니다
그분의 전통이 문반입니다
무반 아닙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거이라는 사람은 문과급제했고요
저 어제 할아버지도 문과 급제했습니다
근데 여러분은 아시나 모르겠습니다
족보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문반도 있고 무반도 있습니다
한 집안에는 문반에 내려왔다가
무반에 옮긴 사람의 후손은 완전히 무반 합니다
다시 물반을 못합니다
거의 있긴 있지만
그걸 못 합니다
한 조건 내에는
뭔가는 명백하고
무반도 명백해요
근데 이순신은 문반인데
무반으로 옮겨서
주 후손들이 다 무반으로 좀 했었습니다
문무는 양반이죠네
그러니까 그분은
개인으로 아는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제가 항상 왼쪽 호주머니에 이거 들고 있습니다
제 명함
여기 제명하면 다 있어요
근데 여기 보쉬다시피 자
필사이 사인사 유명한 말씀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또한
제가 항상 왼쪽 허주머니는 이거 있고
오른쪽 호주머니는?
옛날 돈 갖고 있습니다
이거 언제나 혹시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
이것을 보여주면서
한국 사회에는 율곡 선생님 계시고
또 열국 선생 옛날통운도 했어요 또한
태계 선생도 계세요
옛날 태계 또 현대 태계 어디 가 있죠?
써버렸어 또한
세종태왕은 선비적인 왕이에요
장군적인 왕이 아니고
선비적인 왕이에요
또 옛날 옛날 만원짜리 현대만원짜리
또한 오만원짜리 율곡선생의 어머님 신사임당도 역시 선비예요
선비의 어머님 하시고
선비의 부인 하시고 선비입니다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여기 연할 오천원짜리 있고
여기 항상 들고 있는 것이 이겁니다
이것 이순신,
옛날 이톤을 썼는데
네, 감사합니다
앞에는 거북선도 있고
뒤에는 아산,
아산 기념자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을 항상 들고 있는데
그 부분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을 항상 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신이 역전으로 옮겼다고 백원찰이라고 하신다고 있는데
거기는 거북선도 없지만
이순신이라고 또한
제 책상에는 항상 있는 거북선이 있습니다
제 집에 이것은 선물로 받았어요
팔군에 한 번 강의를 해서
기념으로 이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면으로
개인으로 제가 이순신하고
이런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그분은 국민적인 찬사하는 것
제 2차 들어가려고 한다면
제가 이스라엘 말씀 하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다이애누이라는 말이에요 다이애누
다이애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이 패스오버 잔치할 때
다이애누이라는 노래를 불러요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다이애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충분하다
우리에게 충분하다
그 노래는 모세가 오셔서
충분하다 또 모세는
우리 옛날 노예 상태로 속방시킨 것 충분합니다
또 홍해에 바다를 나눠서
우리 도망가도록 충분합니다
또 사막에는 하늘에서 땅 내리는 것 충분합니다
이스라엘 땅에 가서 가는 것 충분합니다
이렇게 모든 축복이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제가 이순신의 생애를 보니까
충분하다고 충분하다는 것이
여러 곳에 봅니다
오늘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그분의 생애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에는 극복해서 잘했다 하는 것은
한 번만 해도 충분해요
극복을 해서 아주 충분해요
예를 들면
처음서부터는 그분은 문반에 있으면서도
무반에 빠진 사람으로 타락했다 생각할 수가 있는데
아니라고 그분은 아주 힘있게
아주 그런 정신으로 성공하겠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무반하면서도 문과 시험을 볼 때
문과 시험을 볼 때는 쓰는 것도 있고
그분은 쓰는 거 문제 없었을 거예요
원래 문반 정신이니까
근데 문과 시험 볼 때
직접 행해야 할 거 있어요
화살, 말타기 검사옴
이런 거 해야 되는데
그분은 문과 시험을 할 때는
첫 번째는 다리를 걸줄한 일이 있었잖아요
27살 때에 4년 후에 다시 했습니다
다리는 회복하고 나서는
또 옛날 사람은 다리가 회복하는 거
시간 걸렸겠죠
4년 후에 31살 때 합격했습니다 시험을
기드리지 않고
노력을 한 사람으로
아주 이것에 충분히 극복했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묵과 시험을 유명한 그림이 있어요
이거 함경도인데
여기 가까이 보면 말타고
화살 쏘는 거 있잖아요
또 가까이도 보면 보세요
왼쪽에 화살 하나 맞췄어요
여기 맞춘 거 있죠?
또 맞췄다고 푸른 길을 올리고
못 맞추면 하얀 길을 올리는 거
그런데 너무 가까이 있는데
혹시 화살을 잘못하면
사람을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림이 이렇게...
축소한 것 같아요
거리가 있었을 거예요 옛날에는
이런 장면을 보니까
이순신이 이런 경험으로
한 번 다리를 닥쳤고
그 다음번에는 합격했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31살 때 합격할 때 조금 늦어요
나이 조금 많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극복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첫 번째 지명을
저 북쪽에 지금 소련 국경까지 거기서 보냈었는데
그것도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제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나 같으면
저 멀리 가지 말고 소리 쓰면 좋겠다
좀 한 거예요
그런데 그분은 아니고
저 멀리 가는 곳에도 잘하겠다 하는 거예요
거기서는 싸움 하나 있었는데
여진족하고 싸움 있었는데
그 여진 수상을 장군을 잡았어요
직접 머리를 자랐어요
그 사건이 있었는데
그래도 이 일이라는 사람이 공격을 해서 도망갔다 해서
그분을 관직을 뱉다 했고
투옥도 했고 고문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은 첫 번째예요
나중에도 생기겠죠 나중에도
그러니까 이것도 극복해서
서울 훈련장의 책임자 됐었습니다
또 군수 한 번도 책임도 받았습니다
이렇게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는 육군의 장군으로
이렇게 일을 하다가
해군으로 옮겼습니다
해군으로 평안도 두 군데
또 완도
그때는 여수 제일 높은 자리에
이렇게 올라가는데
이것도 극복 아닙니까?
어떻게 육지사람은 바다에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섯 번째는 임진왜란
이것도 말할 것도 없이 어려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순신은 재산을 다하여 해보겠다고 한 거에요
오늘 여러 선생님이 자세한 이순신의 경험관계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언급은 많이 안 하려고
그런데 옥포서부터는 제일 먼저 일본 배를 많이 잠수시켰고
또 여러 곳에
여기 유명한 망가에 명량도 있고
마지막에는 노량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곳에 23번인가 전투가 있었는데
포인트가 한 번도 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전투에 이기는 거예요
그래도 어려움도 생긴 거예요
그 어려움이 누가 일본 배는 여기 있다 보고를 왔는데
공격하라고 명령이 내려왔어요
왕 선조는 공격하라고
이순신이 이건 냄새가 안 좋아
눈치 이것은 함정에 빠지는 거라 했어요
안 간다 했으니까
안 간다고 명령을 오고 났으니까
두 번째 감옥에 갇혔고
고문도 받았고
개겁은 박달도 했고
그러니까 두 번째 이렇게 고생했지만
충실하게 난 하인 군인으로 하겠다 해서
속방됐어 그런 일을 하다가
유명하게 원균 장군은 배를 모두 함정에 빠졌고
배를 거의 다 잃었습니다
아주 크게 치웠습니다
원균의 장군이
그런데 12척 남았어요
12척 남는데
칠철량의 전투가 아주 크게
한국 쪽에 손해가 봤습니다
그런데 선조 왕이 육지에 싸우라고
원래 육지 장군인데
육지에 싸우느라고 하셨는데
이순신이 유명한 답변이 12척 있습니다
12척 있었는데
싸움을 시작할 때 13척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지는 안 싸우고
바다에 싸워보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아주 태란한 겁니다
명량에 이기지는 못했으면
일본군은 서해까지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해까지는 못 가고
일본군은 양식이라고 할 수 없어서
이순신이 아주 잘 했었습니다 이것보다도
명량에는 싸웠을 때
13척은 133세에다가 싸웠다가
13척은 하나도 이뤘지는 못했어요
또 자기 군인들이 10명만 죽었습니다
일본 쪽에는 크게 손해를 좀 봤죠
그러니까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
누가 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치었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도 이겼습니다
또 그분은 개인으로 총알을 맞았다고
왼쪽에 가슴 있는 쪽에
총알을 맞았다고 하는데
자기 조카에게 이완에게 옆에 계시는데
우리 군인은 내가 죽는 것을 알려주지 말라고
그 대신에 내 옷을 입어라 해가지고
조카가 생각해 보세요
자기 큰아버지 역할을 해가지고
그 싸움 끝까지 이렇게 싸우라고 하셨는데
눈에 눈물이 있지 않을까요?
싸우자 끝까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순신이 지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도 이겼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이순신이 영웅,
훌륭한 분이라고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끝으로 거북산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테난이 충분히 좋은 일을 했습니다
이순신이 다른 일이 안 했으면
고북선만 했다면
충분해요 충분히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배가 하나도 안 남는데
너무 아깝지 않아요?
그런데 바다 속에
언젠가는 우리 남한 사람이
고고학자들이 발견해야 돼요
물속에 있을 거예요
한 번 발견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다에 고고학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일을 시켜서 찾아보라고 합시다
또한 11번째 언급해야 할 만한 것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 난중일기 쓰신 것
어떻게 장군이 많은 싸움한 가운데
날마다 붓, 묵, 정이 있을 수 있을까
혼란한 가운데도
매일매일 이 일기에 쓰셨습니다
이것도 대단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 인정한 거예요
Memory OF the world
온 세계에 기억하게
아주 훌륭한 거예요
이것만 하면 충분합니다
또 끝으로 그분은 시인입니다
원래 문반이잖아요
유식한 양반이요
시도 쓰신 거예요
그 시는 한자로 썼었고요
나는 여기 시조로 썼습니다
나는 오히려 시조 좋아하는 편인데
이 시조는 아주 유명한 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분도 문반이지만
아주 유식한 시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언어훈련소, 국방언어훈련소 군인, 해군,
공군을 위한 언어훈련소 있는데
언어는 1급, 2급,
3급, 4급,
5급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말 잘하는 사람은 4급 돼요
그런데 5급이면 뭐예요?
시도 아시는 사람이에요
시는 언어에 제일 위에 있는 거예요 왕관이에요
시라는 거
그러니까 이순신도 시를 쓰시는 거
전쟁한 가운데 씻으시는 것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12가지를 읽어드렸는데
하나만 있어라도 충분해요
그런데 이렇게 12개의
우수하게 성공했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순신 씨가 진짜 훌륭한 영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국민적 찬스한데
국제적인 존경을 좀 봅시다
미국 해군 사령관에 이순신을 언급합니다
그의 하는 일을 공부를 하고
미국 해군들에게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몇 가지 발표 있는데
또한 영국에서도 루시는 영국고요
영국에서도 그분을 인정하고
이 웹사이트는 녹음까지 있습니다
이순신 Korea'S Greatest Commander이라고 영국에서도
그분을 공부하는 거예요
책 여러 권도 있고
이순신 관계 또 논문
이것은 아시아 학회에 발표한 2023년에 한 거 있고요
또한 일본에서도 인정을 했습니다
그 싸움 한 가운데
그들이 배를 열어줄 때는 보고가 나오면
이야 이순신이다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제일 유명한 애드멀
그러니까 바다의 해군의 장군 토고
헤아치로 이라는 분 계시는데
그분은 유명한 게 뭐냐면
러시아하고 1905년에 러시아하고 싸울 때
아주 크게 이겼습니다
러시아 배를 모두 잠수시켰습니다
그러니까 토고가 아주 최대한 훌륭한,
세계적으로 제일 훌륭한 해군의 장군이라고 찬양을 들었을 때 아니라고
그분은 최고 훌륭한 장군은 이순신이다
이렇게 일본 장군도 인식합니다
또 그분의 동상은 하나 있고요 여기에요
근데 다른 곳에 장군의 동상 해군의 장군의 동상
어디 어디 있을까요?
미국에 가면 워싱턴 DC에 John Paul Jones 이라고 유명한
해군 장군 계신데
John Paul Jones 이라고 유명한 말씀
I have not yet begun TO fight
오늘 때 싸움 한 가운데 소식 받았습니다 항복하겠습니까?
할 때는 아니요
아직 싸움은 시작 안 했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는데
I have not yet begun TO fight
이것은 John Paul Jones 미국 해군인데
미국 해군 가운데는
페르겟이라는 장군도 있고
그분은 아까 존 파울 존슨은
독립전쟁 때 남북전쟁 때는 페르겟이라고 있었는데
그분의 유명한 말씀
어느 때 남쪽에 어떤 항구에 들어가려고 할 때는
저 앞에는 마인 마인 있어요
폭탄 그 폭탄은 토르피도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토르피도가 물속에 나가는 거예요
그 당시는 그냥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의 유명한 말은
Damn the torpedoes full speed ahead
그 폭탄을 염려하지 말고
고속으로 빨리 앞으로 가자 하는 말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미국말에 이것도 해군의 장군의 말씀입니다
또한 제2대전 때
미국 유명한 해군 장군이
니믹스 장군 미드웨이 전투에
아주 크게 이기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항상 이순신 다른 나라의 장군을 비교할 때
로드 호레시오 넬슨을 비교해요
영국 사람 이분은 아주 유명한 장군이었습니다
런던에 가시면 동상 있습니다
여기 시내에 아주 높은 기둥에다가
넬슨 장군이 계시는데
트로파우거 사움에는 마지막 사움이고 이겼지만
역시 죽었습니다
또 넬슨 장군이
오른쪽 손을 안 쳤잖아요
오른쪽 손 없습니다
손을 잃었습니다
발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그 손을 동산이 이렇게 손은 옆으로 이렇게 하는 건데
또 눈이 하나 안 좋아요
먼저 싸우면 이렇게 손해가 받습니다
그러니까 소양에서는 제일 유명한 장군,
해군 장군은 누구냐 할 때는
로드 넬슨이에요 틀림없습니다
또 한국에 오면
동산이 시내에
런던와도 같이
시내 중심에 이순신 장군의 동산이 있는 거에요
그들이 여러 곳에
그들의 서로서로 같은 나라에
여러 곳에 동산이 있는 거에요
근데 비교한다면은
영국사람 안 계시니까 괜찮은데
넬슨 장군이 성품에 흠이 좀 많았어요
여러 가지로
그런데 이순신은 성격적으로 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로 좀 차이가 있다고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네,
우리 기쁘게 행복하게
이순신 동상을 보고
그분은 어려움을 극복했고
10번 12번 어려움을 극복하셨는데
나도 하나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어려움 있으면
이순신과 힘을 얻어서
저도 극복할 수 있을까
아까 우리 국제편전회의원장님
구청신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구청신이 뭡니까 극복할 수 있다
나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좀 봅시다 감사합니다
박수 다시 한 번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저는 인상적이었고 모르는 걸 조금 배웠습니다
2하고 12촌, 18촌인가요?
이렇게 있는 것
저는 제가 건축 역사학자라서 그런지
인문학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잘 몰랐습니다
교수님께 한 가지 배웠고요
또 교수님이 한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 있어도 충분해
그런데 총 몇 가지를 했냐면 12가지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영어로 된 거에
We have 12
ships라고 했나요?
I have 12 ships라고 했나요?
우리에게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거하고 맞춘 건 아니죠, 교수님? 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만
굉장히 저희 아들이 있는데요
아들 자랑이 아니라
유치원 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공부한 사람이니까
이순인 장군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그래, 내 죽음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른 사람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어떻게 그걸 알지?
다른 사람들이?
제가 대답을 못했어요
지금도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신 이민웅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런 역사학자 선생님들이 좋은 답을 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고요
너무 경직되어 있는 분이 계시니까요
그냥 한마디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주제 발표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주제 발표는
충무공 이순신 왜 서울인가?
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주시겠는데요
조선시대 정치사회사를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구석구석에 대해서
정말 누구보다도 서울의 역사와 역사만
아는 게 아니라
역사와 공간을 같이,
장소를 같이 연구한
굉장히 융복합 학자로서
해안이 굉장히 깊으신
서울역사편찬원의 이상배 원장님께서 발표를 해주시겠습니다
이상배 원장님 발표 부탁드리겠습니다
방금 소개받은 서울역사편찬원장입니다
앞에 피터슨 선생님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대기를
너무 일목요연하게 잘 발표를 해주셔서
아마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요
제가 이번 시간에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30분입니다
더군다나 그다음엔 점심시간이 연계가 되어 있어서
반드시 시간은 맞추겠습니다
오늘 어떤 큰 주제가
이순신 서울에서 만나던데
그것과 어떻게 보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제를 충무공 이순신 왜 서울인가라고 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주제하듯이
우리 한국 현대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을 꼽으라고 할 때는
아마 주저없이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두 분의 어떤 공통점을 보면
모두 서울 출생이라는 거죠
세종대왕이 어디서 나셨느냐
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
서울이라고 하는 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만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는 거에 대해서는
또 사람마다 모를 수도 있죠
그러나 서울이라고 하는 공간은 인지할 겁니다
그런데 충무국 이순신이
어디 출신이냐
라고 했을 때는 많이 답이 달라요
그리고 대다수 많은 분들이
사실은 충남 아산으로 많이 인식을 하고 있고
충무 통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꽤 많아요
그리고 충청도 사람이다
아예 이렇게 충무공 이순신은 충청도 사람이야
이렇게 인식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야
또는 어디 사람이야
라고 이야기할 때
가장 큰 기준은 뭐예요?
거기에 살았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출생했느냐죠
그거를 좀 간과하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역인물을 선정할 때
우리 기준을 보면
제일 중요한 게
사실은 출생지의 여부
그 다음에 죽은 다음에
거기에 묘가 있느냐
또는 사당이 있느냐
그걸 가지고
사실 대부분 결정을 해요
그 다음에 이것도 저것도 없을 때는
이 지역에 관직생활을 하면서
어떤 업적을 가졌느냐
그런 것들이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탄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인식을,
전혀 다른 인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라는 것에 대해서
제가 이번 시간에 발표를 통해서 바꿔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순신과 서울 역사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러면 단지 출생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이순신이 서울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 갖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 이외에도 훨씬 더 많은 컨텐츠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서울의 역사적 인물로서
우리가 다시 재조명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게
이번에 제가 발표하는 주 목적입니다
지금 현재 서울에서 여러분들이 다니면서
충무공 이순신과를 연상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보면
광화문광장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죠?
그 동상 바로 옆에 보면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충무공 이야기라고 해서
전시관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모르는 분들이 많기는 하지만요
그 다음에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있어요 지하철역
이거 이외에도 충무 초등학교도 있어요
학교 이름에
그것도 다 사실은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
충무에서 따서 지어진 거죠
그 다음에 명보사거리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가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가 있고
그 다음에 신도빌딩에도
생가터 표지판이 있어요
또 종광역 1번 출구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로로 출발했다라고 하는 안내판이 하나 있어요
자 이런 것들을 보면
이렇게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 이거 충무공 이야기 안에 전시가 돼 있는 모습입니다
전시는 비교적 잘 돼 있어요
그 다음에 여기 보면
충무로라는 충무로 여기 있고
충무로라는 이정표 지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가터 표지석이 이렇게 있어요
명복장 앞에 가면
충무국 이순신 생가터 해가지고
안내문이 있고요
여기 보면 신도 빌딩에도
충무국 이순신 생가터라고
이렇게 또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생가터가 두 군데 있는 거예요
두 군데 있는데
이 두 군데의 거리가 직선거리로 얘기하면
한 150M 정도 될까요?
굉장히 짧은 구간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죠
왜 생각터가 두 개일까?
두 군데가 다 가능성은 있는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어느 한 포인트다라고 찍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세종대왕이 탄생하신 곳이
어느 지점이다라고 찍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얘기죠 왜?
그 당시는 집원이 없어요
그 당시는 집원이 없어요
만일에 그 당시 집원이 있고
그것이 일제강점기의 집원과 연계가 되고
이렇게 한다면
아주 명확한 지점을
우리는 찍을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큰 틀에서
권총동에서 태어났다라는 기록들은
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은 한 지점을 찍기는 어렵다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강역에 가면
이렇게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해서
이거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연구하고
그걸 기념하려고 하는
그런 단체에서 세워놓은 거예요
이것도 숯불 속에 있어서
아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사실 잘 안 보여요 자,
그런데 그럼 이렇게 현존하는 충무공의 흔적들의 문제점이 무엇일까?
자, 먼저
이 동상과 충무공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이렇게 보면
딱 정면에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동상이나 충무공 이야기를 보고
아 충북 이수진이 서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여기 동상이 있구나
이렇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단지 이 동상이 세워지고 하는 것은
사실은 국가에서 목적을 가지고 세운 거거든요
쉽게 얘기해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무인 무인으로
우리가 추앙을 하는데
무인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우리나라를 앞으로 미래를 국가 안전을 도모하는데
어떤 이정표로서 대표적인 임무를 선정해서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놓은 것이
사실은 광화문에 있는 동상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얘기해서
출생지에 있기 때문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리고 옆에 있는 세종 충무로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충무공 이야기도
그래서 충의 상징 인물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 다음에 탄생지 표석은 두 곳이 있어서
약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점과
그 다음에 탄생지 표석에 가면
이분이 여기서
어떻게 탄생을 어떤 활동을 했고
이런 내용은 없어요
그런 내용은 없어요
제목만 생각해요
그리고 안의 내용은
그래서 장소의 역사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런 단점이 있고요
그 다음에 충무로 같은 경우에도
이게 충무로가 정말 충무공이 이순신하고 연계된 건지를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왜?
충무라고 하는 시호를 가진 분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9명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중에
이 충무시호를 가진 사람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물론 대다수는 충무공이 이순신이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그런 한계점은 분명히 있다
그 다음에 백의종군로에 보면
여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어떤 옥중 생활이나
여기서 신문을 어떤 내용을 받았고
어떤 고초를 겪었고
이런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어디 어디를 거쳐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라고 하는 내용뿐이에요
그리고 그 이외에는
이 장소가 왜 충무공과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보면
지금 서울에 남아있는
이런 모든 흔적들이
이순신과 그와 관련된
공간의 역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인이
그냥 혼자 가서 봐도
아 여기가 충북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이기 때문에
이런 이정표나 내지는 상징물들이 있구나라고
인지할 수 없다라고 하는
그런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충무국 이순신 탄생과 관련해서는
실록이나 사료에 굉장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선 실록을 통해서 보면 선조하고 유성룡,
당시 영의정이죠?
유성룡하고 나누는 대화가 있어요
그 대화에 이순신에 대해서 선조가 물어보죠
그러니까 유성룡이 뭐라고 그러냐면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선조가 뭐라고 해요?
그 사람이 서울 사람이야?
이렇게 물어봐요
서울 사람이야?
그러니까 유성룡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선조는 이때까지도
그 사람이 서울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물어보면서
아, 서울 사람이구나
이렇게 인지하고 있는
이 충무공 전서에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죠
가정을사년 3월 8일 자시에
충무공이 한성 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거는 아주 명백한 팩트이기 때문에
권천동의 위치를 알면
대충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윤희의 백호전서 같은 경우에도 보면
원래 충무공 이순신 집안은 독수 사람인데
뒤에 한양에서 살았고
그 다음에 대대로 유업을 한 집안이다
유업 즉 문신 집안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이제 허균의 성서부부고라는 문집을 보면요
허균이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었다라고 기록해요
그런데 이 건천동에 있었는데
이 건천동에 여러 사람이 살고 있지만
대략 한 34집 정도가 있었고
근세, 근세라는 건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대에 유성룡, 이순신,
원균이 일세를 풍미했다고 그래요
결국에는 허균의 친가가 살았던
권천동 안에서 유성룡도 살았고
이순신도 살았고
원균도 살았다는 얘기예요
그들이 거기에 모여있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허균이라고 하는 사람은
충북의 이순신과 동시대 사람이에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죽었죠 허균은
그래서 이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이순신 탄생제에 대해서
어떻게 연구가 되어왔을까?
사실 역사학자가 본격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어요
연구 동향을 한번 살펴보면
호암문일평 선생이 호암전서에서
처음으로 언급을 합니다
그러면서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니까
그 건천동이 어디일까? 해가지고 호암전서에다
세 군데를 얘기해요
낙산 아래,
삼청동 있고
남산 아래 이 세 군데 중에 하나일 것이다
라고 추정을 해요
단지 근데 왜 낙산이고
왜 삼청동인지는 얘기를 안 해요
그분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얘기했는지
그 다음에 이거에 대해서
처음으로 글로서 밝힌 사람이
1958년에 김용상 선생입니다
김용상 선생이 논문에서
도성대지도라고 하는 18세기 지도를 근거로 해서
중구 인현동 일가 부군으로 추정해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충무공 이순신 탄생에 대한 최초의 논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서울시에서는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1985년에 명보화트홀 앞에 생가터 표석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생가터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하는 와중에
중구청에서 이순신 장군 생가터를 확인을 해서
거기에 생가를 조성하려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생가터에 대한 용역을 발주해요
도대체 어디냐
그 위치를 한번 고증해봐라
그래서 타당성 조사 용역을 했는데
용역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
위치 고정이 어렵다
정확한 지점을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가를 조성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니까 생가를 조성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고 하니
이 연구 영역이 어떻게 보면
부정적으로 나온 거잖아요
부정적으로 나온 거니까
그 다음에는 생가를 포기해요
생가를 지을 수가 없어요
없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이렇게 탄생지에 대한 연구가 돼 있는데
탄생과 관련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건천동 지역이라고 했잖아요
그 건천동 지역이 바로 여기에 보면
밑에 건천동이라고
이렇게 한자로 건천동 마른내에요 마른내
마를 건 자에 내천자
그러니까 물길이 자주 말라버린다는 얘기죠
그런 건천동이라는 표기가 있어요
그래서 남산 아래가 건청동 지역이었구나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생과 조성 타당성 영역 결과를 보면
원래가 건청동 지역이
이 일대라고 봤는데
처음에 고지도에는 영역 결과는
이쪽으로 건청동이라고 하는 지역이 확대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영역 결과는 하죠
그럼 영역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는 얘기는
이 일대가 광범위하게 생과 터 영역에 포함된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확한 위치 비정은 불가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 다음에 탄생과 관련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가 주목됩니다
그런데 유성룡의 문집이나
이런 기록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충공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이런 평도의 표현이 있어요
그 사람은 무인에 가까운 전쟁놀이 하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을 어울릴 때도
항상 수장에 노릇을 했고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어떤 기록에는
이순신 기록 측의 기록에는
유성룡과 친구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사실은 친구라기보다는
이순신은 1545년에 태어났고요
유성룡은 1542년에 태어나요
세 살 위입니다
원규는 유성룡보다 2년 위예요
그래서 원규와 이순신의 차이는
5살 차이가 나요
원균하고 이순신하고
전장에서 사실 갈등이 불어났던 것은
이런 것도 하여튼 하나의 요인이었을 거예요
원균은 자기는 5살 위나
내가 위인데
맨날 제 전공은 제가 세우고
자기는 자존심 상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보다 좀 더 명확하게 유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를 보면
어려서 한 동네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런데 유성룡이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유성룡은 의성 출신이에요
의성이 외가라서 의성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의성에서 태어나서
유성룡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던 것은
13살 때입니다
13살에 처음으로 와서
이건 유성룡의 연보에 나타나는 거예요
13살에 처음에 와서
동학에 가서 대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이순신은 10살이죠 3살 차이니까
그런데 이순신의 형이
이오신이 이순신보다 3살 위예요
쉽게 얘기해서
유성룡과 이오신은 나이가 같아요
친구 사이일 수 있죠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단정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행장에 보면
형을 따라다니면서 공부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요
문과 공부를
그럴 가능성을 봤을 때
이웃인을 따라서 유학을 배우는데
동학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그 다음에 유성령은 13살 때
처음에 서울에 와서 보고
그 다음 해에 다시 강원도로 갔다가
그 다음에 다시 또 함경도로 갔다가
이렇게 이동을 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그러니까 옛날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이렇게 벼슬을 하면
지방관으로 가면 애들이 따라가거든요
그래서 자꾸 이동을 하는데
13세 때 처음 왔다가
그 이듬해 속초로 갔다가
강원도로 갔다가
그 다음에 몇 살 때
유성령이가 다시 서울에 오냐면
16살 때 와요
16살 때 와서
서울에서 향시에 합격을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23살 때
성경관에 입학을 하는데
유성령과 이순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딱 두 번의 기회예요
한 번은 유성룡이 13살 때
즉 이순신이 10살 때
그 다음에 유성룡이 16살 때
즉 이순신이 13살 때 만났을 가능성
성균관에 들어갔을 땐 이미 아닙니다
왜냐하면 23살이면 그 당시 충무공이 20살 아니에요
그때는 이미 아산에 가 있을 때예요
아산에 가서
자기가 무과로 전향을 했을
그 타이밍이기 때문에
만났을 가능성이 없어요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라는 얘기죠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의 놀던 모습을 보고 했다라고
하는 기록을 보면
1554년 10살 때 만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을까
그렇게 봅니다
우선 이순신과 서울에서 공간들을 보면요
아까 얘기했지만
탄생지로서의 건천동,
그 다음에 어려서
전쟁 놀이했던 그런 곳
남산자락 일대에 한 10여년 이상
거기서 놀았겠죠
그 다음에 유성룡과 이순신이 함께했던
그런 동화학에 만났을 가능성이 높고
그리고 이제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훈련원 그 다음에 사복시 그 다음에
경복궁의 선전관청
그 다음에 의금부
그 다음에 유성룡의 집터
이런 것들이 이순신이 머물렀던 공간이에요
서울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훈련원터
그러니까 이순신이 처음에 무과를 급제하고 나서
아까 피터슨 선생님도 얘기했지만
사실은 훈련원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저 경험까지
함경도 꼭대기까지 갔단 말이에요
백그라운드가 없으니까 가라고 하면 가야죠
그런데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결국에는 훈련원을 거쳐가거든요
그래서 훈련원에서 근무를 하는데
대략 2년간 근무를 합니다
2년 조금 넘는 정도죠
1510개월, 13개월 해서
2년 정도 근무하고
그런데 여기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아까 율곡 이와의 관계 율곡한테 가서
한 번 더 부탁 좀 해봐
옆에서 푸시를 해요
그러니까 이순신이 내가 왜 오히려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데?
그러면서 안 가죠
그런 거라든지 병조정랑이 인사를 하는데
요즘 얘기하면
이제 인사 평정을 줘요
평정을 줬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을 좀더 이렇게 위로 올려 줘요
어 그런데 그 사람이 이순신 보다 아랫사람이 내걸 죽어라
이순신이 거부를 해요
어 끝까지 이건 안된다
어 그러니까 그런 인사 평정에 대한 거부
그 다음 병조판서 선여
예 첩을 이것만 해도
사실 병조판서가 자기 선여를
이순신한테 처부를 보내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순신이 거부를 해요
잘만 하면 어떻게 보면
자기 줄을 하나 잡는 거잖아요
출세줄을 그런데 그렇게 하면
병조판사 당신에게 더 오해의 소지가 갈 거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당하지 않다라고 거부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충무 이순신을 평가할 때
다양한 인적 소양을 많이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많이 이야기하는 게
대부분 다 어디에서?
서울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에요
그의 어떤 청렴이나 공정이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때
다 전쟁터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서울 관직 생활에서 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이게 하나의 콘텐츠죠
그다음에 사복시토는 사실은 오래 머물지는 않았어요 15일인가?
16일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부친상을 하고 나서
3년 하고 기복이 되어서
관직에 다시 임명을 했는데
사복씨로 임명이 돼요
사복씨는 대부분 아시겠지만
중앙과 서울에서 군마,
군마가 아닌 일반 왕이 타는 말이라든지
궁정에서 사용되는 말을 양성화하는 중심기관이죠
그래서 여기도 주로 무인들이 거쳐가는
그런 관청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디냐면
종로구청 자리예요
종로구청 자리인데
최근에 이 사복시 여기 보면 그림이 있잖아요 지도
이거와 똑같이 원형이 출토됐어요
종로구청을 짓는 과정에서
원형이 출토돼서
지금 저건 보존에 들어갈 겁니다
그 흔적을 한번 알 수 있는
그런 거고
여기에 사목시 주부를 하고 있다가
종육품 갑자기 조산만으로 발령이 돼요
이게 아마 파격적인 승진이죠
종육품에서 종사품으로
무려 3, 4계단을 뛰어올라가니까
그래서 말들이 많았어요
이거에 대해서 비판 세력도 많았고
경복궁 선전관청으로 오는데
조삼만호 근무할 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북병사 이일에 모함을 받아가지고
결국엔 처음 백의중군을 합니다
처음 백의중군을 해서 돌아왔는데
그래서 관직에 박탈당하고 있다가
1589년 11월에 무겸선정관에 임명이 돼요
무겸선정관이라는 것은 무관으로서 겸직한다 뭘? 선전관을
선전관은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당시 무겸 선전관은 종구품입니다만
그래도 백위종군에서 사탈 관직당했다가
다시 관직에 올라갔다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죠
그래서 여기에 한 달 정도 근무를 합니다
한 달 정도 근무를 했다가
바로 현감으로 종구품에서
바로 원상태로 그냥 뛰어 올라가죠
그래서 형감으로 해서 발령이 된다
그 다음에 의금부터가
사실은 또 백의종군하고도 관련이 있고
의금부에는 이때 투옥되기 전에
사실은 1590년에 차사원으로
의금부에 한번 상경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 달 의금부에서 머물렀던
그런 기록도 있고요
그 다음에 1597년 3월 4일에 의금부에 투옥이 돼가지고
그 당시에는 임금을 속인 죄,
적을 치지 않고 놓아준 죄,
남의 공을 가로챈 죄
뭐 이런 죄목을 붙여서
문초를 당하죠
근데 문초를 딱 한 차례 당합니다
그리고 4월 1일 날 방면이 돼서
백의종군을 떠나죠
그 현장이 지금 의금부 터가 있고
이 지도입니다 당시에 그림,
여기에 갇혀 있었던 거죠
그리고 나서 백의종군을 떠나는데
첫날 나와가지고
그 다음날 그 다음날 다시 남대문을 통해서
한성으로 들어와요
그래서 누굴 만나냐
영의정인 유성룡을 만납니다
그것도 밤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이목이 있어서
조용히 밤에 혼자 가서
유성룡 집에 가서
둘이 술을 먹으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새벽에 남 볼까 두려워서
새벽에 싹 다시 남대문을 빠져서
한강을 건너 가거든요
그래서 유성령이 집토해서
한번 잠을 자고
잠은 못 잤죠
밤새도록 얘기하느라고
그래서 아마도 유성령이 위로를 하고
혼란한 나라 정세라든지
향후 방안 이런 걸 논의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고요
여기 유성령을 기르는 서액길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것들을
고지도에 표시를 해보면
이런 형태예요
경복궁, 사복시, 건천동, 유성룡 집토, 남산, 훈련원, 동학, 숭례문
이런 것들이 이순신이 다 흔적을 남기고 갔던
그런 장소들이고요
이걸 현대 지도에 이렇게 표시를 해봤어요
현재 지도에 표시를 하니까
경복궁에 겸무 선정관 터가 있고
사복시, 의금부,
그 다음에 이순신 탄생지, 훈련원, 동학,
유성룡 집토 숭례문 어떻게 보면
이게 참 V자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V자 형태로 되어 있고
유성령 집터 바로 뒤가 남산골 한옥마을이고
이순신 기념관 예정지에요
어떻게 보면
이순신 기념관이 들어가는
그 위치가 정점에 딱 서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기념관 예정지로는
잘 잡지 않았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이게 V자 형태이기 때문에
이걸 따라서 이순신의 길을 만들어서 탑사여행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이순신은 결국엔 서울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
총 23년 이상을 서울에 있었다
이순신이 53세에 돌아가시는데
대략 그 삶 중에
43%가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탄생이라
그것 이외에 서울과의 관련성이 만큼 많다라고 하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각 장소별로
이수진 관련 스토리를 우리가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그다음에 지금 현재 서해안,
남해안은 국난 극복의 현장이잖아요
그래서 그 자체로서 굉장히 연구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도움을 거쳐가지고
상당히 특성화 전략이 되고 있어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려지고 있고
그 다음에 현충사를 정점으로 해서
아산은 아산대로
이순신의 외가이고
결혼 후에 거기서 살았고
그 다음에 지금 사당도 있고
그래서 현충사를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어요
그런데 서울은 오랜 탄생지이자
오랜 기간 삶의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공간이 없다라고 하는 거
그게 지금 큰 문제라고 하는 것이고
지금 현재로는 중구청에서
조금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그것이 미미해서
일반에게 너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서울시 차원에서
좀 더 체계적이고 규모 있게
어떤 헤드쿼터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시기가 됐다라고 하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이순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알리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요
점심시간 딱 오십 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네, 이상무의
서울역사편찬원 원장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저는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인데요
역사학자들이 얘기를 할 때
조금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배 선생님의 글과 내용은
역사의 입문이라고 하는 내용하고
도시와 건축이라고 하는
장소라고 하는 공간을 일치시켜서
굉장히 설득력 있게 말씀을 하시죠
이게 우리가 추구하는 융복합의 학문의 정수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상배 원장님의 굉장히 힘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리고 이수진 탄생지가
왜 서울에 이런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될까 하는
여기 오신 선생님들도 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 앞에 어떤 미래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울 수가 없겠죠
이 메가시티 서울이 기억해야 될 공간이 무엇인가
이런 점에 대해서
오늘 이런 진지한 학술회의를 통해서
다시 한번 이순신 김용공관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될까라고 하는 점에서
시민과 학자 선생님들께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전 세션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그럼 오전 세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