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 최욱의 걱말서] 초등학생이 15시간 근무, 팩트일까? l 전태일 50주기 특집(with 정박, 전태일 열사 친구, 이수호 위원장)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수 있다
아름다운 청년이다
50주년이 전태일 기념관을
태일TV라는 인간 전태일은 성격이 불같고
그렇지 않았을까요?
굉장히 차분하고 겸전하고 목사님 같았죠
그렇습니까? 세상이 아주 다양해지면서
우리의 일들도 굉장히 많아졌는데
우리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도 노동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죠
최옥 씨도 지금 이 방송 노동자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승 노동자라고 표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승 노동자
그런데 이 노동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분께 다들 빚이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시죠?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아 전태일 열사
우리 잊어선 안 됩니다
동대문에 옷 사러 갔다가
항상 저는 전태일 열사를 만나고 옵니다
아 그렇습니까? 청계천 쪽인가요? 그렇죠
거기 그 동상이 있는데
누군가 해서 봤더니 전태일 열사의 그렇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의 50주기
번국민행사위원회가 지금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추모하는 체험이라든지 전시, 문화, 공연,
학술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서요
오늘 그 말씀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실 세 분
소개해드리죠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님 나오셨고요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친구셨다고 합니다
임현재 선생님, 역사
권력인간의 저자, 팟캐스트
일당백의 정박님 세 분 모시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정박님은 약간 좀 끼어넣기 그런 느낌인데요
캐스팅이 아니냐 끼어팔기 아닙니까?
정박님이 또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워낙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함께 나오셨고요
그렇군요 전태일 열사님의 친구분이 와,
여긴 또 나오셨네요
어서 오십시오 진짜로 그 친구 관계였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언제적 친구입니까?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거 하기 9달 전
제 공장으로 전태일 열사 찾아와서 만나게 됐는데요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친구였고
그 이후로는 동지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대문에서 만난 인연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전태일 재단의 이사장님이 나와주셨는데
저도 운명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만
나이가 동갑이여서
같이 다 친구로 생각하고
평화 시장에 있을 그때 22살 나이 때는 같이 못 있어도 그 뒤에 이제 내 마음 속에 늘 같이 살고 있는 동무, 친구로 그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사장님은 유명하신 분 아닙니까? 노조 위원장하셨죠?
최욱 씨 만큼은 못 돼도
한때는 저도 얼굴을 많이 팔리고 했었죠
방송 전에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제가 몰라 뵀는데
벗으시니까 엄청 유명하신 분이네요
정교수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하고
진보정당에도 애도 쓰고
여러 가지 동생을 철이 안 들고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 하면
사실 인지도 면에서는 굉장히 높으신 분인데
왜 이렇게까지
우리가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되는지
그리고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는지
그런 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솔직히 잘 모르잖아
그냥 뭐 영화 정도로 이미지 정도만 있죠
이미지 정도만 있어요
이름 정도 이걸 아주 길게 말씀드리기는 좀 힘들고요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있겠죠
1970년 11월 13일이 전텔 열사가 분신한 날인데
1970년이 아주
우리 근대사에서 두 가지로 기록되는 날입니다
특별한 해가 되거든요
1970년 7월 7일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을 했고
우리 말 그대로
수출지상주의 산업의 어떤 시작이
뭔가 상징적으로 이루어진 해이기도 하고
일부러 7월 7일에 맞춘 겁니까 이거? 그때 맞췄겠죠
그렇죠 딱 보니까 날짜가
그런데 말 그대로 70년 11월 13일 날
전텔 열사의 분신으로
한국 사회가 또 엄청난 충격을 안게 된 거죠
지금까지는 잘 살아보세요
수출지상주의 수출을 마치 군사작전처럼 하다가
그 사실 수출의 그늘에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
들의 유린당하는 인권이라든지
참혹한 노동조건
이런 것들이 이제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정말
그래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이후의 사회가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수 있다 이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태일 열사 있기 전까지 그냥 노동자 는 소모품
그 이후로는 좀 생각의 전환이 좀 생겼다
일단 전태일 열사가 그 책에서
항상 일기에서 말씀하셨듯이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이 근로기준법을 읽고
해석을 해야 되는데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대학생들이 지금까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다가
이제 정치를 뒷받침하는
노동운동으로 투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당시 또 전틀렐리아 사회 죽음으로
그나마 정말 1일 16시간의 가혹한 노동 조건이었거든요
근무조건은 그런 것들이 그나마 조금 개선되어서
참혹한 노동 조건에서 좀 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아름다운 청년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전태일 열사에 대한 글로 배운
의미를 저희가 한번 살펴봤고요
그러면 현실 속에서 전태일 열사의 의미
우리 저 친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전태일 열사가 나한테 찾아와서
언제 한번 보자 하는 지나가는 인사로
그렇게 알게 됐었는데
이후에 전태일과 다시 만났을 때는 자신이
그 전에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던 바보회를 정리하고
더 확장된 그리고 뭔가 좀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조직으로 다시 바꾸자 하는 의미에서
친구들을 귀합하고 있을 때
소위 얘기하면 포섭이 된 거죠
그래가지고 만났을 때 몇 명의 친구들이 더해졌고
그 친구들이 모여서 바보해
자기가 활동했던 그거에 대한 의미를 설명했어요
얘기를 듣는데
그때 우리 현실을 나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월급 받다가
그거 가지고 가족들 먹고 사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전태일은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줬어요 신기하다
그래서 그게 뭐였느냐
그러면 해고되거나 그 회사를 자퇴를 했을 때
월급을 안 줘도 그걸 어디서 보고받을 길이 없었던 거고
근로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그거에 대한 항의나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구조였죠
그리고 또 하나는 작업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그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없고
또 할 의지도 없고 이런 상태였는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뭉치면 개선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말에 좋다
동감을 하고
바보회를 삼동
친목회로 확대 개편을 하는 삼동 친목회 무슨 뜻이죠?
세 가지의 건물 한 동, 두 동, 세 동 할 때 3동
그래서 이제 3동 침묵회로 이름을 바꾸고
그래서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하면서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아니, 전태일 열사도 그냥 평범한 노동자였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당시에 전향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래서 그때
당시는 그래도 전태일 씨는 좀 더 많은 것을 공부했고
연구도 했고 그랬더라고요
특별한 분이네
진짜 그때 당시는 그런 얘기는 우리한테 안 했죠
이런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할 것인가
그래서 노동실태조사를 해서 노동청에 건의도 하고
진정도 하고
굉장히 논리적이었습니까?
말솜씨 같은 게 아주 목사님 같았죠
그렇습니까? 설득이 잘 되고
그럼 인간 전태일은 성격이 좀 이렇게 불같고
그렇지 않았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차분하고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점잔하고
우리는 그때 친구들 만나면 이놈
저놈 그런 어투였는데 이 친구는 그랬습니까? 그럽시다
이런 존칭을 넣을 수 있는 그런 어투를 가지고 있었죠
그러면 우리 이사장님께서도
전태일의 의미를 좀 한번 짚어주시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나라의 새로운 시대를
1970년도에 열었다고 봐야 되겠죠
그 뒤에 많은 노동자들이 따라 들고
일어나오면서 노동자들의 각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뭔지
그리고 노동자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지
그래서 그때부터 실제로 노동운동이 시작되고요
그리고 지금 대학생 얘기 나왔습니다만
많은 대학생들을 비롯해서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그때 사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런 군사독재에 그냥 매몰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주는 대로 받아 먹고 살아가고
아는 것이 맞는가라는 데 대한 아주 엄격한
그런 문제제기를 했던 거죠
그래서 각성을 하기 시작했고
종교계에서도 많은 각성이 일어나면서
기독교에서는 실제로
민중신학이라는 우리나라의 신학의 틀이 그때
잡히기도 했었죠
그때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지금 노동운동을 하는 주류의 정신이
아직도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죠
전태일 정신을 오래 되살리자
그래서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을 중심으로 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전태일 정신 개성
노동자 대회,
전국 노동자 대회를 매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만
전태일 열사 덕분에 우리 노동 환경이 개선이 된 겁니다
정용진 씨 그때부터
제대로 된 노동운동이 이제 시작이 됐거든요
그렇게 보면 됩니다
진짜 대단하신 분이네, 들을 수 우리 친구분도
그러면 당시에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셨던 겁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저도 재단보조로 일하고 있을 때고요
하루에 몇 시간 일하셨어요?
보통 출근시간은 8시인데
8시까지 기다릴 수 없잖아요
7시쯤 나오게 되면
통행금지 전에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막차를 탈 때까지
일한다고 보면 그게 근로시간이에요
그러니까 거의 저녁 11시까지
밤 11시까지 일을 했었죠
와.. 노동시간은 어마어마했었고
그럼 처우는 어땠습니까?
처우는 그때
노동자들의 실상이
대체적으로는 당시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여공이 돼서 올라오는 거죠
한 4, 5살 뭐 이 정도
나이 13살짜리에서부터서 한 30살까지도 있는데
그때 당시는 저희들이 파악한 숫자로는 시다가
대체적으로 13살,
14살 보죠
보조보다도 되기 전에 시도하라고 보조의 보조입니까?
전체의 한 40% 정도 되는데 이 사람들이 나이가
그렇게 어렸었고
그들이 일 시키는 대로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고 도시락도 못 가지고 오잖아요
시골에 부모님은 계시고
자기는 서울에 어떤 집에 얹혀서 사는 경우에
대체적으로 도시락을 못 가지고 나오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이제 그런 아이들에게 밥을 안 줍니까
회사에서? 밥을 안 주죠
너무 심하네
자기가 다 도시락 가지고 다니면서 먹어야 되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밥을 싸울 수가 없죠
그래서 그냥 오기 때문에 전태일 여사가 그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자기가 차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줘서
아이들이 배고픔을 달랠 수 있도록 해놓고
자기는 쌍농동까지 걸어서 가는 유명한
풀빵 얘기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동대문에서 전태일 열사가 나오셨는데
그러면 우리 정박님
당시에 이렇게 봉제공장이 다른 산업에 비해서도
더 열악했습니까?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수출지향적 경제구조를 채택했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말씀대로 14세에서 한 24세
그러니까 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많이 충원하다 보니까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아무래도
지금 말씀대로 절실한 삶의 목표라고 가 있다 보니까
조직하기도 힘들고
그러니까 사용주 입장에서는 부리기가 쉽지 않습니까?
부리기가 쉽겠죠
그러니까 조사해보면
거의 조사 대상의 대부분이 위장병은 다 가지고 있고
특히나 근로조건이 공간이 좁으니까
그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고 다락방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서
허리를 구부려서 일을 해야 되니까
일을 하면서 폐병 말고도 근골격계 질환이 있죠
신경통이라든지 계속해서 이렇게 아주 열악한 거죠
19세기 영국의 어떤 참혹한 아동노동의 어떤 폐해
이런 것들 이상이 한국의 70년대에 펼쳐졌다
이렇게 보실 수 있겠습니다
참 저런 얘기 들어보면 정영신 참 쉽게 돈 법니다
나보다 더 잘 보는 네가 있잖아요
나한테 그래
알겠습니다
오늘은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14일부터 11월 15일까지 전태일 추모의 달로 정하고
여러 가지 추모제가 열리고 행사가 진행이 되나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장님 행사 프로그램에 앞서서
전태일재단은 어떤 일을 합니까?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고 추모를 하면서 기억하고
우리 시대에 어떻게 잘 발휘시킬 것인가
그가 주장했던 그런 내용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만들어갈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사업으로 만들어서 하는 그런 추모와 기념
그리고 정신을 개성하는 사업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런 단체이죠 1년 내내 바쁘시겠지만
그럼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겠군요 그렇습니다
매년 11월 13일이 분신하신 날이기 때문에
그날을 중심으로 해서 행사들을 하고 있는데
특히 올해는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특히 50주년,
100주년 이런 중요한 해는 특별히 그 정신을 살려서
한번 해보자라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요
마침 올해 50주년을 맞으면서
특히 서울특별시가
작년에 청계천의 전태일 기념관을 마련을 했습니다
작년에요? 정영희 씨 몰랐죠?
작년에? 조금 부끄럽습니다 몰랐습니다
정영희 씨 그걸 전태일 재단이 위탁
운영을 하고 있는데요
그걸 중심으로 해서
서울시와 같이 많은 여러 가지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신을 어떻게 개성하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학술토론회
이번에는 특히
국제학술토론회를 통해서 앞으로 노동이 어떻게 변화되고
발전해 나갈 것인가
제4차 산업혁명을 맞으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코로나
때문에 이 상황이 갑자기 닥쳐서 지금 다 혼란스러운데
코로나 이후에 우리 노동은 어떻게 해야 될 건지
이런 걸 집중적으로
국제적으로 토론하는 그런 학술토론회를 비롯해서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함께할 수 있는 문화재 또는 탐방
또 찾아가는 전태일 기념관 행사
여러 가지 재미있는 행사들을
코로나 이 상황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긴 합니다만 재미도 있고
또 시민들의 호응이 좋아서 잘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고 의미도 있고
꼭 필요하긴 합니다만
정영기 씨 같이 조금 수준
낮은 사람들은 재미 이런 걸 또 좋아하거든요
그래야 이제 사람들이 관심 갖고
더 이렇게 많이 알려지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재미 측면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들이 있는지는
조금 저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그런 프로그램 없을까요?
우선은 방문해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예를 들면
노동예술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 전시회도 하고요
음악 같은 경우는 팟캐스트도 우리도 한번 해보자
그런 얘기 나오는데
최욱 씨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해보자 유튜브를 통한 여러 가지 내용들
그래서 테일TV라는 그런 것도 만들어서 네 유튜브 네
그걸 통해서 열심히 또 하고 있고요
또 같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90초짜리를 만들어서 경연하는
그런 것도 그런 게 있네요
전태일 노동인권영상제 영상제도 하고요
노동가요제 이런 거 없습니까?
노동가요제도 하는데
올해는 특히 코로나
상황이 겹치면서 많이 모여서 어떻게 하는 건 힘들고
온라인으로 온라인으로
이번에는 전태일 추모가라는 전태일을 기억하면서 만든
아주 좋은 노래가 있어요
그걸 불러서 보내주면 그걸 가지고
대합창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렇게 온라인으로 같이 참여하고 즐기는 미스터
노동 같은 거 어때요?
미스터 노동 미스터 트롯을 조금 바꾼
심사위원의 안치환 씨 같은 분들
딱 앉혀놓고 어떠냐고 나쁘지 않아요
미스터 노동
그런 좋은 생각을 미리 좀 주지 않으세요
전태일이니까 물어보지 않았고
어떻게 드립니까
우리가 우리 친구분 어떻습니까?
제 아이디어
우리 전태일 열사 넋을 기려야죠
미스터 노동으로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늘 너무 딱딱하고 너무 엄숙하고
이런 지적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우리도 가볍게 하자
그리고 시민의 눈높이 다가가자 아 그래요
계속 친근감을 갖게 하는 그런 생각이 있으시구나
이렇게 해서 이제 저희들
딴에는 엄청나게 이렇게 해서 하는 게 이런 수준이에요
아니 아니 좋아요 아니 훌륭해요
그러니까 미리 좀 우리 최우식아
저도 말할 때 하나 드리겠습니다
가짜 전태일 뭐 이런 걸로 해갖고
진짜 막 그 봉제 미싱
뭐 이런 걸 이제 막 돌리는 거지
훈련 막 가혹한 훈련
그때 당시에 노동 조건으로 사람들만 하고
그렇게 한 번 하는 거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고요
지금 우리 기념관 참 예쁘게 잘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는데
바로 청계천 변에 있어요
그래서 청계천 따라서 있는 산책로
거기에다가 띄워서 무대를 지금 만들었습니다
우리 기념관 앞에 특설 무대 아주 예쁘고 좋아요
거기에 언제 한번 와서
거기서 한번 방송, 선방송 하셔도 좋고 거기
버스킹 등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얘기들 와서 하고
아마 내일 모레 수요일은 하림 씨가 와서 또 하림?
혼자 거기서 콘서트 하림 혼자 올 게 아니라 하림
이번에 나훈아 씨 도와줬거든요
그럼요 나훈아 씨 같이 와야죠 나훈아 씨
제가 한번 최옥 씨가 부탁한다고 얘기해보겠습니다
우리 임현재
선생님이 좋아하실 만한 행사가 하나 있는 게 아까
버스비아께서 풀빵 나눠줬잖아요
그래서 13KM
그러니까 전태일 기념관에서 쌍문동
그러니까 전태일 열사의 집터까지
13KM를 걷는 행사가 있어요 그것도 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어 풀빵을 같이 걷는
사람들한테 좀 나눠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 추모제 관련해서
우리 임현재 선생님께서는 함께하지는 않으시나요?
함께합니다
너무 나몰라라 하시는 것 같아서요
81년도에 전두환 정권 들어서면서
우리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하는 노동조합들을
몇 개를 해산을 시키는 그런 만행을 저질럴 때
1년 동안 또 감옥도 갔다
나와서 가족들 먹여 살려야 되니까
그동안 일하면서
전태일 재단을 사실상 우리 젊은 친구들하고
같이 창립을 한 거죠
그리고 그 전태일 재단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내년도부터서 우리 이사장님을 우리가 모셨죠
한 5년 됐습니다
5년 전에 제가 마지막 봉사로 여기 와서 저도 전쟁하고
나이가 같기 때문에 이런 세심이 만만치 않죠
사실은 이제 급이 장관하고 그 위에 총리하고
대통령 하셔야 될 분을 모셔와서 처음으로 웃으신다
전태일 재단
이사장을 이렇게 좀 해 주시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랬더니 정스럽게 지금 서울시장을 설득해가지고
서울시의회를 움직여서
전태일 기념관을 만든 거지 않습니까?
가만 놔둬서 서울시가 그거 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갑자기 후반부에 이렇게 터뜨리시네요
대통령보다 높은 이수호 위원장님이 와서 하니까
저분 말이면 무조건 해야 돼
이렇게 해서 전태일 기념관을 기념관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기념관이 생기니까
그 기념관에서 하는 일이 지금 엄청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태일 정신은 전태일은 어떤 사람이었나
왜 전태일 훌륭한 사람이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냐
이런 인생관을 다시 설정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공간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세상이 바뀝니다
그래서 전태일을 그냥 어디 실제화시켜서
어디다 가둬둘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전태일을 활용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럼 이제 앞으로 그 아이들이 자라나서 산업
어떤 리더들이 된다고
그러면 지금처럼 이렇게 산재 사고
많이 나는 공장 안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풀빵도 자기도 사서 나눠줄 줄도
아는 그렇게 만들어가는 게
전태일 재단이 하는 역할입니다
우리 서울시가 도와드렸더니
막판에 뒤통수를 치시네
네 서울시 강한이라도 하진 않지만
그러나 얘기하면 또 하는 게 서울시입니다
그 부분 인정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한 단어
혹은 두 단어로 추격하자면 나눔과 연대 이런 겁니까?
전태일 정신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을 건데요
저 같은 경우는 전태일은 사랑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 연민 풀빵을 나누어주고 하는 건
정말 전태일은 자기보다 정말 어리고
여공들이나 못 참았다
그래요 사랑연민 그리고 지금 나눔연대
그리고 이제 조금 더 나가서
실천하고 행동하는 그분이 정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 모든 것을 다 합니다
다 쏟아부었는데도 움직도 안 하거든요 세상이 안 되겠다
내 몸이라도 해서 좀 자극을 줘야 되겠다
이렇게 이제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실제로
그러니까 나는 그런 실천력 그게 대단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돌아가시면서 자기 친구들,
친구 있지만
친구들과 어머니를 불러놓고
제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이게 이제 마지막 말이었다는 거죠
친구들이 그때 확 변했어요
실제로 옆에서 보는 사람을 이렇게 보면
그때는 정말
이른바 무지렁이 그냥 일이나 하는 그런 노동자들인데
이게 아니네 바뀌고
특히 어머니가 바뀌어가지고
이소선 어머니라고 완전히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겠지 아닙니까?
그때 한 마흔 몇 살 된 아줌마가 그렇게 영향을 주고
거기에는 사랑과 연대
그리고 실천하는 그런 정신
어떻게 그렇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숭고할 수 있나 싶네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 숭고 표현을 참 잘하셨는데
숭고라는 말이죠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세요?
우리 임현재 선생님도?
그때 당시 저는 이제 감옥에 갔어요
개인적 범죄로 들어가는 건
우리는 뺍니다 빼셔도 상관없고 넣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다 관련된 거죠
거기에서 발생할 때는 범죄가 되고
삼동에 활동하고 결국 사회운동하다가 그렇게 되신 거죠?
입으로는 또 감옥에 가고
또 한 분은 공장에 붙들려서 못 나오고
이러면서 정말 11월 13일 돌아가시고
할 그때의 장면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얘기한 대로 마지막으로 자기가 주장했던 8개 항목
이것만 고쳐달라
동대문 통화시장에서 기껏 해봤자
창을 내달라 그 정도 수준이에요? 이런 거예요
그것도 안 들어주고
그러다가 몇 년 뒤에 됐어요?
1970년이죠 11월 그렇게 하고
장례를 안 치르고 계속 싸웠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노동청에서 들어줄게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르고
바로 이분들이 얼기투합하고 해서
11월 13일 돌아가셨는데
11월 27일 날 청계피복노조라고 노동조합을 개선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모태가 돼서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전태일 열사도 대단한데
그 뜻을 아직까지도 이어오신
우리 친구분도 정말 너무 멋지고 훌륭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기다리시더라고요 아까부터 그런데 진심입니다
저는 그래서
저희 전태일재단은 실은
어떤 독지가가 또는 어떤 정부에서
커다란 돈을 받아가지고 운영하는 게 아니고
시민들의 참여로 모든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월급 후원 방법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태일재단 재단에다 연락하면 되는데요
홈페이지에서 전태일재단
전태일재단 검색해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우리 정박님께서 끝맺임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태일정신 같은 경우는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적으로는 한 알의 미달이 서가지고
부활을 한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우리 전통적으로 보면 살신성인이다
내 몸을 희생해서 인을 이루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어떻게 보면 자기의 삶을 정말 살고 간 사람이다
저는 이렇게 보입니다 자기의 삶을 살고 갔다고요?
보통 우리는 남의 삶을 흉내내고
남의 말을 내 의견으로 생각하고
남의 정례를 그렇게 인용해 살아가는데
정말 자기의 삶을 살고 갔다 이렇게 저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안타까운 삶으로만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진짜 자기의 삶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젊은 친구 똑똑하지 않습니까? 철학적이고요
저도 이제 정리가 되네요 50년 만에 정리가 되신다
실천보다 이론이 힘이 셀 때가 있네
하여튼 저희도 잘 우리
전태일 열사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세 분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친구셨던 임현재 선생님
그리고 전태일 재단의 이수호 이사장님,
팟캐스트 일당백의 정방님까지 세 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걱정 말아요
서울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들로 만들어집니다
팟빵 채널 통해서 댓글 남겨주시고요
서울골뱅이 팟빵닷컴으로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주도 오늘만큼 의미 있는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I SEOUL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