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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가로명의유래]토정길 - 이지함은 어떤 사람인가!토정길
2007-09-21
강사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이장우
1. 토정 이지함의 생애
탄생과 가문
1) 탄생 : 중종 12년(1517) 충청도 청도 보령에서 탄생 - 외가 / 여말ㆍ선초에 문명을 떨친 이색의 7세손
2) 아버지 : 현령ㆍ수원판관 이치(李穉, 1477~1530)
3) 어머니 : 광산 김씨, 세종 때 집현전 학사를 역임했던
??????????????? 판관 김맹권의 딸
성장과정
1)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둘째 형님 이지번(李之番)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2) 이지번은 '백의재상'으로 불릴 정도로 청렴했으며, 그의 아들 이산해(李山海)는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 이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北人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3) 이산해의 아우로, 우참찬을 역임했던 이산보도 이지함에게서 배웠다. 이지함은 이산해보다도 오히려 이산보를 더 높게 평가했다.
이지함의 제자
1) 이지함은 적지 않은 후학들을 양성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헌(趙憲)이었다.
이지함은 조헌을 보기 드문 인재라고 극찬했고, 조헌도 이지함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생각했다.
2) 이지함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천인 출신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충청도 남포 출신의 서기(徐起)였다.
처음에는 선학(禪學)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지함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유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이지함의 소개로 서얼 출신의 이중호(李仲虎) 문하에 들어가 대학ㆍ중용 등을 배웠다.
관직생활
1) 이지함은 초야에 파묻혀 지내다가 56세 때(1573) 崔永慶ㆍ鄭仁弘ㆍ趙穆ㆍ金千鎰 등과 함께 이조의 천거를 받아 6품직을 제수 받고 포천 현감에 임명되었다. 조정이 재정 지원을 해주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2) 선조 11년(1578)에 다시 천거를 받아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다.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걸인청(乞人廳)을 설치하는 등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지함과 토정길
1) 그는 마포의 한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 굴을 만들고 그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었던 까닭으로 스스로 '토정'이라고 호를 붙였다.
2) 지금 이지함이 토정을 짓고 살았던 마포에는 그를 기념하여 1984년 11월에 설정한 '토정길'이 있다. 토정길은 마포구 용강동 마포대교 입구에서 신석초등학교를 지나 하수동까지 이어져 있다. 이 길은 총 길이 1.9km로, 용강동에서 하수동까지 한강을 따라 이어져 있다.
3) 해방 직후만 해도 마포 유수지 근처에 이지함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 터가 남아 있었고, 또한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윗토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도 있었다.
4) 그렇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지금은 찾기 어렵고, 토정의 집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표석만 있을 뿐이다.
2. 이지함의 경제활동
이지함의 경제관
1) 이지함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경제활동을 중시하였다.
2) 백성들이 모두 생산활동에 종사하여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 민생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까지도 든든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경제활동 실천 방안
1) 그리하여 그는 해결책으로 우선 내륙과 연해의 자원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것을 강조했다.
2) 단순히 농업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광산을 개발하고 어업과 염전을 경영하여 창출된 재화(財貨)를 널리 유통시킴으로써 국부(國富)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3. 이지함과 <토정비결>
한국인과 토정비결
1)《토정비결》은 한 해의 신수를 열두 달의 운세로 나누어 찾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예언서로, 이지함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2) 불과 2,30여 전만 해도 정초에는 으레《토정비결》로 그 해의 신수를 알아보는 일은 민간의 일상적인 세시풍경이었다.
[제작일시 : 2007.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