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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남한산성 여진족 누르하치
[서울가로명의유래]삼학사와 삼학사의 길
20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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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한명기 / 명지대학교 사학과

1. 三學士는 누구인가?
모두 서인으로 우율의 학통, 병자호란 당시 언관직에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세 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말한다.
삼학사는 결사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선양에 잡혀가 참형되었다.

ㅇ 홍익한(1586~1637)
진사 홍이성과 안동 김씨의 子, 본관 남양, 초명은 습이었다가 개명.
이정구에게 사사, 1615년 소과 급제, 이괄의 난 때 공주에서 정시 급제(39세), 이후 전적을 거쳐 1636년 사헌부 장령으로재직.

ㅇ 윤집(1606~1637)
현감 윤형갑과 황씨 소생, 본관 남원, 자 성백, 호 임계, 백형 윤계에게서 수학, 1627년 소과 급제하고 1631년 별시 문과 급제 이후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36년 당시 홍문관 교리로 재임.
김상헌의 姪女와 결혼하여 2남을 둠, 장자 윤이선의 아들 렴홍의 막내딸이 홍익한의 손자 홍우석에게 출가하여 윤집과 홍익한은 사후에 사돈 관계.

ㅇ 오달제(1609~1637)
윤해의 삼자, 본관 해주, 오윤겸의 조카, 자 계휘, 호 추담, 1627년 소과를 거쳐 1634년 별시문과 급제, 호란 당시 홍문관수찬.

2. 三學士의 활동
1) 1636년 3월,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칭제건원
여진족은 12세기 아골타 시절, 金을 건국하여 두각을 나타낸다.
누르하치의 성장 : 1583년부터 주변 건주여진 제압, 1591년 조선 임진왜란 직전 건주여진 부족 장악,1616년 뚜렷한 독립국가 의식을 드러내면서 나라 이름을 대금으로 개명, 12세기의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금이라 불렀다.

2) 三學士의 항청척화 활동
청은 칭제건원 직후 용골대 등을 파견하여 사실 통지, 조선의 회유를 시도
- 불사이군의 명분에 대명의리를 고수하는 조선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
- 장령 홍익한은 칭제의 참람함을 통박하고 청사 참수를 촉구한다.

3) 병자호란의 시작과 남한산성에서의 활동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고, 12월 13일 안주 도착, 12월 14일 개성을 통과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남한산성에 도착해서도 계속되는 척화와 주화의 논쟁으로 12월 22일, 윤집은 최명길 등 주화자들의 목을 치라고촉구했다.
1637년 1월 23일, 윤집과 오달제는 적진에 가서 죽겠다고나선다.

4) 三學士의 최후와 그들의 정신
홍익한은 2월 28일 심양에 도착하여 청이 먼저 정묘의 맹약을 어겼다고 통박하고, 우리는 대의에 죽을 뿐 성패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일갈하며, 3월 5일 순국한다.
윤집과 오달제는 4월 15일 심양에 도착, 역시 청 태종은 두 사람이 수창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유를 시도한다.
처자를 데려와 살게 하려고 권유하지만, 결국 4월 19일 순국한다.

[제작일시 : 2007.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