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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성 : 사적 승격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 2022년 6월 16일 오후2시
지금부터 탕춘대성 사적 승격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탕춘대성의 가치를 밝히고
향후 사적 지정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번
학술대회는 탕춘대성을 주제로 열리는 첫 학술대회라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탕춘대성은 숙종
44년인 1718년에 축성이 시작돼서
잠깐 축성이 중립되었다가
영조 30년인 1754년에 최종 완성된 성각입니다
오늘 학술대회는 탕춘대성의 현안과 보존정비 방안
그리고 역사와 변화
과정 등을 비롯해서 사적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명칭 문제 등이 깊게 논의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간 탕춘대성에 대해서 연구해 주신
학자분들을 모셨습니다
발표와 토론을 맡아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참석해주신 내빈과 발표자분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 발표를 해주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혜은 선생님 참석하셨습니다
두 번째 발표를 해주실 문화유산연구소 기일
기호철 선생님 참석하셨습니다
세 번째 주제 발표를 맡아주신 서울시립대학교
김영수 교수님 참석하셨습니다
네 번째 주제 발표로는 공주대학교
이찬희 교수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다음으로 종합토론을 맡으신 한국교통대 백종호 교수님
참석하셨습니다
토론자 선생님들은 이따
토론 시간에 개별적으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탕춘대성의 발굴과 전시에 힘써주신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님 참석하셨습니다
끝으로 탕춘대성의 사적지점과 세계유산
등재 업무를 총괄하고 계신 주용태 문화본부장님
참석하셨습니다
그 밖에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지만
관계상 일일이 혼명해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울시와 공동으로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의 세계세 등재를 맡고 있는 경기도청과
고향시청 경기문화재연구원
관계자분들께서도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한양도성지킴이 도성길
라자비 선생님들께서도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주용태 문화본부장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주용태 본부장님께서는 단상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서울시 문화본부장 주용태입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 탕충대성
사적 승격을 위한 오늘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주신 시민분들과 또 학계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본 심포지엄의 자장이신 백종호
한국교통대학교 교수님을 비롯하여 좀 전에 소개한 발표자
또 토론자 분들께도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심포지엄은 아까 사회자도 말씀하셨듯이
탕충대성을 주제로 한 첫 학술적 모임이어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자리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탕충대성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또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논의하여
사적으로서의 가치를 확인하는 초석을 놓고자 합니다
심포지엄의 주제인 탕충대성은 4
.8KM의 길이와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을 수호하고
또 전란시 북한산성으로
백성들의 안전한 대피를 돕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성곽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서울시 둘레길 명소로서
많은 관공객들이 성곽을 따라 산책도 하고
또 편히 쉬어가는 것으로 변모하여
그 가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는 탕춘대성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관리하고
원형 보존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홍수 로 인해서
해선 되었던 탕춘대성의 홍지문과 오관수문
는 1970년대 복원공사를 통해서
현재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탕춘대성이 온전한 모습을 지닌 채로
후수원들에게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받고
또 사적 승격을 통해서
보다 전문적인 보존 관리가 이루어져
많은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시 한번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발표와 토론을 맡아주신 교수님들과 또 연구원분들
또 탕춘대성의 애정을 가지고 참석해 주신 시민 여러분
그리고 이 행사 장소도 해주고
도와주신 우리 김용석 관장님
비롯해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학술의 의의를 잘 짚어주신 본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시는 오늘 논의된 학계의 고견을 토대로
상춘대성의 사적 지정 가능성을 모색하고
앞으로 세계유산으로 갖고 나갈 계획입니다
오늘 행사는 전체 주제 발표를 먼저 듣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1시간 동안 종합토론이 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로서 개인적인 바람이긴 합니다만
발표 시간이 잘 준수돼서
원활한 학술회의가 진행되도록
발표자 선생님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로 휴식 없이 첫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는데요
첫 발표는 정혜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께서
탕춘대성의 축성과
한양도성의 배우산성으로서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주시겠습니다
약간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해서
정혜은 선생님의 발표는 종합토론을 거치지 않고
개별토론 으로 발표가 끝난 다음에
바로 개별 토론이 진행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된 대로 잠깐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청중들께서 양해해주신다면
발표자 에 한해서 마스크를 벗고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발표자에 한해서 마스크를 벗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겠습니다
포인트
아 안녕하십니까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학 중앙연구원 책임 연구원 정혜은 이라고
합니다 아 먼저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서
발표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기쁘게 생각하고요 오늘 그 제가 발표
드릴 내용은 그 탕춘대성의 그 축성하고
관련된 여러가지 좀 내용들을 확인하고 숙종하고
영조대를 거쳐서 이 완성 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어이 축조된 그 탕
충대 성의 어떤 그 축조 의의가 뭐냐
이제 이것이 오늘
저의 중요한 그 주제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목차는 먼저 그 숙정 때를 좀 살펴보고
그 다음에 영조 때를 거쳐서
어그 축성 의의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좀 구성을 해보았습니다
어이 탕충대 성은 사실은 지금
뭐 부분에서도 이제 인삿말 에서도 나왔지만
도성 하고 북한산성을 있는 어
그러한 그 성각이 기 때문에
사실 기존의 어 숙종 때
북한산성 축조가 인제 그 됐잖아요
그래서 북한산성 연구에서 상당히 많이
자주 언급이 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도성 어 어떤 그 도성
수호 하고도 관련해서 이 주제는 상당히 익숙한 주제
이긴 하지만
사실 탕춘대성만
갖고서 연구가 된 것은 한 두 편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 초점이 북한산성 그다음에 도성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 성과를 보면
숙종 때의 탕춘대성의 성격이 뭐냐
이것은 바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이어주는 도성
방위용 관방시설이다
그래서 그 밑에 대표적으로
어떤 연구자는 탕춘대성도 숙종대를 말씀드립니다
도성방위를 위한 관방시설이었다
이런 인식이
기존의 그 연구성과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짚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발표에서
사실 이 탕춘대성에 대한
어떤 역사적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조대의
탕춘대성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수적으로 있어야 된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때
북한산성에 대한 축조가 이루어지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사실 지금도
북한산성은 숙종 때를 위주로 해서 연구가 되어 있고요
그렇다면 경종을 거쳐서
영조 때는 북한산성이 어떤 기능을 했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지금
잘 언급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탕춘대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북한산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이 북한산성에 대한
그 위상이 변화하면서
영조 때 이 탕춘대성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에
저는 주목을 해서 오늘 발표문을 꾸며 보았습니다
먼저 숙정 때 탕춘대성의 축조와 중단입니다
이건 이제 기존의 연구에서도
좀 알려진 밝혀진 내용입니다
탕춘대성은 1711년에 북한산성 축성이 완료되고
그 다음에 1712년에 그 횡궁이 완성이 됩니다
이때 숙종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요
내가 이번에 북한산에 성을 쌓은 것은
백성들과 함께 들어가서 지키고자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숙종 입장에서는 이 북한산성이라고 하는 것은 유사시에
백성들과 같이 피난할 수 있는
일종의 보장처로서 나온 것이죠
이렇게 행궁이 완성이 되자
윤치상이나 이유
같은 사람들이 주장을 해서 이 북한산성이
산세는 너무 험하고 좋지만
안에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군량을 다 적절한 군량을 비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실은 다른 곳에다 좀 창고를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다 쌓는 것이 좋을까
그래서 맨 처음에 숙종은 사실 반대를 합니다
모두 다 북한산상에다 넣자 이렇게 하지만
결국은 연산군대에 조성이 된 탕충대
옛터에 있던 창고를 쌓기로 결정을 해서
1714년에 탕충대의 창고가 완성이 됩니다
창고가 완성이 되니까 이유가 이렇게 얘기를 하죠
창고를 보존하고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축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건의를 합니다
사실은 축성
탕춘대에 처음 축성을 주장한 사람은
1702년의 신환인데요
신환은 이때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도성의 외성으로서의 탕춘대 성을 쌓자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실제로 숙종 때 이 탕춘대 성은 도성의 외성이 아닌
맨 처음에는 탕춘대의 창고를 지원하는 보호하는
이런 의미에서
탕춘대의 성을 토성으로 축성하고 이유를 합니다
그래서 1718년에 8월부터 10월 5일까지
약 40여일간에 거쳐서 축성이 됩니다
사실은 제가 이거 되게 부끄러운 얘기인데
2200보가 지금 정확하게 몇 킬로다
이것은 아직 제가 여기다
적지를 못했지만 이 절반 정도가 축조했다고
사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토성이 아닌 잡석으로 쌓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1718년 어느 정도 완성이 된 다음에
서쪽에 축조를 하고
난 다음에 12월에 EU가
한 20일 정도만 더 쌓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웬만큼 될 것 같다라고 건의를 하니까
이때 일종의 노로들을 중심으로 해서 더 이상은 안 된다
반대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두 번째 절입니다
그러면 탕춘대냐 도성이나 이제 이 주제인데요
1719년에 그 이듬해죠 1718년에 이 북쪽
그러니까 서쪽에다
이제 그 성곽을 쌓은 다음에
그 이듬해에 그 숙종의 지시로
이제 찬반 의사가 이제 그 진행이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뭐냐면
민진우가 사실은 맨 처음에 북한산성 축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찬성을 해주거든요
근데 이제 이렇게 논의가 되니까
민진우가 글을 하나 숙종한테 올립니다
내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왜 그때 북한산성을 싸차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하면서 본인을 자책을 하고
민진우의 동생인 민진원이 뭐라고 하냐면
숙종한테 성상께서는 북한산성이 형세로 보아서
지킬 만하다고 해서
끝내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교를 하셨지만 이 도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성을 지켜야 됩니까?
버려야 합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하교를 주십시오
이렇게 민진원이 숙종한테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숙종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요
나는 북한산성이다
도성은 너무 넓어서 지킬 수 없고
나는 북한산성을 고수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도성이 어찌 백성들과 같이 지킬 곳이 되겠느냐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어이 의견을
사실은 숙종 입장에서는 이 탕충대 성을 이 어떻게 보면
북한산성 외성 으로서
계속 좀 축조를 좀 더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그 의도를 나타낸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1712년에
2월달에 어그 찬반 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발표 문에는 좀 자세하게 제가 적었는데요
그게 이제 숙정 실록에도 나오고 있고
승정원일기에도 나오는데 인원이 좀 달라요
그래서 대강 승정원일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한 찬성이 24 .6
% 한 25
% 되고요 반대가 한 75
%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신뢰들이
반대를 한 거죠 이 축성을 찬성하는
의견은 뭐냐면 탕춘대성을 조금 더 쌓아가지고
북한산성과 안팎이 되게 해서
보장처를 잘 마련해야 됩니다
이게 이제 아주 중요한 찬성하는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이 탕춘대 성이
북한산성을 지원하는 외곽성으로서 더 쌓아야 합니다
이게 이제 주요한 의견이었고요
두 번째는 뭐냐면 이 도호성과 가까운 탕춘대
성을 쌓아서 이 보장처를 마련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역시도 보장처의 의미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세 번째 의견은 이 탕춘대 성은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제 조도빈 같은 경우는
도성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국왕의 판단으로
북한산성을 조성을 했기 때문에 이
북한산성을 보완하는 이 탕춘대성을 쌓는 것은
저는 좋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전염병도 있고
기근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렸다 쌓으시면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의견을 낸 거죠 이 축성 반대
의견 한 75 %의 신뢰들이 반대를 합니다
어 근데 저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면 이 축성을 반대하는 탕춘대
축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앞부분에 있다
항상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임금님
북한산성은 버릴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탕춘대 축성은 민생을 위해서 정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 의견을 반대 의견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탕춘대가 사실은 도성하고 북한산성 사이에 있지만
이게 지대가 낮기 때문에 북한산성에서 내려다보고서
여기를 공격하면 탕춘대성도 함락이 될 뿐더러
바로 근처에 있는 도성도 위험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은 탕춘대성을 쌓으면 도성이 위험해집니다
이런 논리로 반대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뭐냐면요 이 탕춘대성을 싸우면
도성도 넓어서 지킬 수 없다고 했는데
탕춘대성 거기에 북한산성
도대체 어느 병력으로 이 세 성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이게 이제 반대하는 논리고요
그리고 네 번째는 이건 숙정한테 너무 뼈아픈 얘기죠 이
북한산성을 믿을 수 없고
그리고 북한산성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임금께서 지금 도성을 포기하시겠다고 하면
탕춘대성도 지킬 수 없는 것이 너무 명확합니다
대강 이제 이런 논의가 나오기 때문에
숙종은 상당히 이제 그 고민을 하죠
사실 숙종은 제2 초반이나 제2
후반부터 도성을 지킬 수 없다는 도성난수의 입장을 견제
합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이 다 축조 인데
다음에는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명을 합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제기한 북한산성 의 단점은 뭐냐면
지세가 높은 것은 대단한 장점이지만
지세가 높은 만큼 안에 공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탕춘대성 축성
반대 논리의 핵심은 도성을 지키지 못하면
북한산성도 지킬 수 없고
도성과 가까운 성은
더 가까운 탕춘대성은 더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중요한 탕춘대성을
더 이상은 축조하면 안 된다는 반대 논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을 하고 싶은 상황은 뭐냐면요
도성수호를 사실
반대 논리에는 도성이 중요하다고 하는 논지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도성수호를 간조하면서
탕춘대성의 축조를 우려하면서
결국은 탕춘대성이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조성이 됐기 때문에
결국은 북한산성마저도 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산이 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송상기 같은 경우는 지금 탕춘대성 때문에
이미 지은 북한산성도 함께 버리고자 하니
어찌 큰 가오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왜 그렇다면
숙종이 이 시점에서 탕춘대성을 왜 중단했을까요
물론 그 반대가 75 %나 되고 그 다음에 민생도 어렵고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사실은 이
북한산성 같은 경우는 숙종이
사실은 아주 그 주장을 해서 지은 성이거든요
그래서 숙종 입장에서는 탕춘대성 축성으로 북한산성
무역농까지 확산이 되기 때문에
본인 주도로 쌓은 북한산성의 당위성을 훼손
당할 우려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탕춘대성 축성이라고 하는 것은
도성과 북한산성 중에서
북한산성을 선택하겠다는 표명이었고
사실은 이 축성준단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북한산성만은 내가 포기를 못하겠다고 하는
그런 입장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렇게 좀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어 세번째 영존 때
그 탕춘대성 성격 변화입니다 이 무신난 이전에
북한산성의 상황은 이 경종
1년 이후로 거의 산성을 버려 두었다 라고
이렇게 말이 나올 정도로
대개 이제 관심이 저하가 되고 있구요
그런데 이제 무신난 이후에
북한산성의 위상이 저는 좀 변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그 영조 같은 경우는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요
무신년의 일로 그러니까 무신난이죠
무신년의 일로 살피면 적이 북한산성을 점거했다면
경성, 서울의 목구멍을 점거하는 것이니
어찌 기뇨하고 중대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숙종 때는 여기가
내가 숙종은
백성들과 같이 함께 들어가겠다고 하는 보장처였지만
영조는 입장이 좀 다릅니다 이 북한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도성이 보호가 됐다는 거죠
그래서 이 북한산성은 도성
수호에 매우 기뉴하다고 인지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행공 먼저 보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서 탕춘대
창고가 재평가가 되기 시작합니다
영조 12년에 북한산성에 보관된 군량이 부족합니다
되게 오래되고
그렇기 때문에
새 곡식으로 바꿔야 되는
그 필요성을 제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북한산성 같은 경우는
약 5만석 정도가 숙정 때 보관을 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한 12
,600섬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1만석이 지금
창고에서 묵힌 지가 되게 오래됐고
그다음에 1천섬은 탕춘대
창고에 쌓아둔 지가 10년이 됐다는 이제 이러한
그 의견들이 계속 나오니까
결국은 이 북한산성이 어
피난처에서 도성을 보호하는 이제 산성으로
그 영조가 인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 도성
보다 더 가까운 북한산성 보다는
도성과 더 가까운 곳에 있는 탕춘대
창고도 그 재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송진명 같은 경우는 이 탕춘대에다
일단은 곡식을 쭉 이렇게 보관을 해 해서
평상시에는 여러가지
그 국가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비상시에는 여기 있는 곡식을 북한산성으로 달라서
좀 한번 여기 이 창고를 좀 새롭게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이걸 이제 영조 한테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김제로 같은 경우도 바로 이 속인 명
송진 명의 의견에 이제 지지를 해서 어 강차
그러니까 한강 주변에 창고 했다 이
그 곡식을 보관하는 것보다는 탕춘대 참고했다
곡식, 일종의 군량이라고도 할 수 있죠
나중에는 비상시에는 군량을 저장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을 하면서
영조는 송진명과 김재로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영조가 고민을 하는 건 뭐였냐면 이 탕춘대가
조금 약간 외곽이고
길이 평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다 옮기면서 민폐가 좀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물으니까 돈 주고 그걸 운반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탕춘대
창고에다 곡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이 됩니다
이렇게 숙종 때
어떻게 보면
탕춘대 창고는 북한산성을 지원하는 창고였다가
이렇게 영조 때는 바로 도성을 지원하는 창고로
그 쓰임새가 변환되었다고 파악이 됩니다
그러면서 탕춘대도 축조가정
다시 영조 때
축조가정 축조를 하자는
논의가 있게 됩니다 이 축성의 계기는 1742년에
강화유수 김시안이 강화성을 벽돌로
좀 고쳐 쌓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 건의해서
이제 강화성이 축조가 되는 이 시점에서
바로 이제 이 탕춘대성도 논의가 됩니다
어떻게 논의가 되냐면 이 강화성을 이제 쌓는 와중에
이제 그 중앙에 있는 이제
신뢰들은 강화성을 왜 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계속 거기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을 가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도성을 수호를 해야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영조가 동의를 하죠
그래서 1745년부터
1746년 사이에 도성이 일부 보수됩니다
그런데 이때 여러 가지 연구 성과를 검토를 해보면
영조 때 도성은 새롭게 쌓았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숙종 때
쌓은 부분들을 보수하는 그런 성격이 더 짙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성이 보수가 된 다음에는 영조의 지시로
도성 밖의 창고를 도성 안으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 알려진 대로
1747년에
금의원과 어영청의 창고가 도성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1743년에 그 이듬해죠
영의정 김재로 같은 경우는 도성의 서쪽이 좀 허술하니까
도성 방어를 위해서는
탕춘대에도 성을 맞아 쌓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권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영조는 이미 북한산성이 있는 상태고
북한산성은 버릴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탕춘대 성을 쌓는 것도 맞지만
지금은 급하게는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이때 논의는 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개해드린 대로
이듬해인 경리청에서 뭐라고 하냐면
본청이, 경리청,
저희 청이 관장하는 탕춘대는 도성의 목구멍으로서
도성을 보장하는 곳입니다
이런 논의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래서 영조 같은 경우는
2년 뒤인 1747년에 총영청 구간,
북한 탕춘 절목 15조를 마련을 합니다
이게 그 유명한 경리청을 확파하고
그 다음에 삼청동에 있던 그 총룡청의 건물을 이쪽
탕춘대 안으로 새 건물을 지어서 이동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이 총룡청에서는 북한산성의 성첩
그러니까 성각하고 건물,
군기, 무기 같은 것을 관장하게 되고요
그리고 이제 총룡사는 지책을 한 단계 높여서 북한산성
& 탕춘대도 같이 관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탕춘대 건물은
최종적으로는 부속 건물까지는 1748년
5월에 완공이 된 걸로 파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1747년에 탕춘대 성을 영조가 지시를 하죠
그때 누구한테 지시를 하냐면
바로 총용사 구성임에게 얘기를 합니다
숙족대 탕춘대
성을 영조를 주관한 사람이 이유라고 한다면
영조 때 탕춘대성을 쌓는데
가장 앞장선 사람이 바로 구성임입니다
그런데 그때 영조는 뭐라고 하냐면요
당시 여러 가지 반대 의견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한꺼번에 쌓지 말고 올해 이만큼 쌓고
내년에 이만큼 쌓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탕춘대성이 완성되지 않을까
이렇게 구성임한테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매년 쌓을 것을 요구를 합니다
하지만 1752년까지 성각
축조가 진행이 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니까 김상로가 탕춘대
성을 빨리 쌓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까
영조가 총영사는 아무 쓸모 없이
왜 거기 나가 앉아 있느냐
이러면서 이제 구성임을 엄하게 질책을 하죠
그래서 결국은 이듬해인 1753년부터
1754년 사이에 이 탕춘대성의 축성이 됩니다
그래서 1753년에는 총 그 체성 그러니까 몸체죠
그 한 1263보가 축조가 되고
안문이 한 곳이 조성이 됩니다
새로 쌓은 곳이 약 659보고요
나머지는 이제 옛날
숙종 때 쌓은 데 딱 이어서 이제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54년
4월부터 8월까지의 공사를 재개해서
채성과 여장을 더 축조를 해서 2년간 지금
저기 향림봉에서 한북문 석조까지
2400보가 완성이 됐다고 그렇게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탕춘대 명칭을 연웅대
고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한북문
남쪽에서 도성 아래까지
사실은 한 1400보를 축조할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한 50보밖에 못 쌓고 말았다
물력과 시간이 부족해서
더 이상 쌓지 못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사실 탕춘대성은 지금 이제 서성이라고
각종 지도에 나와 있듯이 향림봉에서 한북문
그 사이가 주요한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축성 구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숙종하고
영조 때 쌓은 축성의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탕춘대성은 1718년, 1753년,
1754년 이렇게 총 세 차례 이루어지게 됩니다
약간 이제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조금씩 그 정리하면서
좀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숙종 주도로 축성한
북한산성 같은 경우는 1703년에
숙종은 사실은
북한산성을 먼저 축조하려다가 이 도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그 신뢰들의 의견에 밀려서 도성부터 개축을 합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1711년에 숙종은 많이 변해 있습니다
이를 도모하는 것은 여럿이 하더라도
결단은 나 혼자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북한산성을 쌓아야 되겠다 해가지고
북한산성을 축조를 합니다
그리고 숙종의 입장은
도성은 둘레가 너무 넓어서 지킬 수 없고
북한산이 도성과 가까움으로
어떻게 보면 북한산성은 도성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내가 백성하고
함께 들어가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을 하죠
그리고 나서 1714년에
북한산성의 비좁은 내부를 해결할 방안으로
탕춘대 예터에다 창고를 짓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부분에 말씀드렸듯이
탕춘대 창고는 북한산성의 외창의 성격이 진하죠
그리고 1718년에
이윽 등 탕평놈자라고 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강력하게
권위를 하면서 탕춘대 서쪽의 성곽을 축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탕춘대 성은 사실은
숙종 때는 북한산성의 외곽을 지키는 성곽이자
유사시에 북한산성을 지원하는
외성의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1719년에 이 탕춘대성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중단이 됩니다
어이 사실은 1712월 18년 12월에
이제 그 찬성을 했던 노론 측에서는 이 도성
수호를 주장하면서
탕춘대성을 더 이상 축성하는 것을
계속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민진이 형 같은 경우는 도성 이냐
탕춘대성 이냐 를 양자태계를 요구를 하고
숙종은 북한산성을 선택을 하게 되죠
그래서 75
.4 % 정도가 반대를 하면서 도성
수호의 의견을 제시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탕춘대성 축성 여부가
북한산성과 연계되어서 논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
북한산성에 대한 평가와 함께 북한산성도 버려야 된다
도성만 지켜야 된다고 하는 이런
의견이 나오니까
숙종은 더 이상
북한산성에 대한 어떤 가치 시비를 막기 위해서
탕춘대성의 축조를 중단하게 됩니다 이 노론이 편찬한
그 실록을 보면
북한산성 축성이
가장 큰 실책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론이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보를 보면 이 숙종실록 사관이
북한산성이 실책인 것은 알았지
탕춘대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왜 몰랐지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숙종 때의 탕춘대성의 축성의인은 유사시
보장처로 삼은 북한산성을 지원하는 외성입니다
숙종은 본인이 주도한 북한산성의 쓰임새를 높이기 위해
탕춘대의 창고나 탕춘대성을 축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탕춘대성의 지리적 조건이
북한산성보다 도성에 더 가까우다 보니까
도성 수호 문제가 야기가 되고 있죠
그래서 노론이나 소론
모두 숙종이 주도한
북한산성의 쓰임새 및 가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숙종 때의 탕춘대 성이 미안으로
그친 이유는 도성수호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이 들고요
이렇게 숙종 때
사실은 앞서 말씀드렸던 신록, 두 가지 숙종실록이나
숙종실록 보궐정우가 바로 무신란이 일어나는 영조 3년
3월에 완성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영조 초반만 하더라도 이 탕춘대에 대한
어떤 가치가 그렇게 높다고
저는 생각을 안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무신란을 계기로 해서 바뀌죠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뭐냐면
영조가 도성수호를 천명하면서 유사시 입보처로
북한산성이 숙정 때 지정이 됐지만
영조는 입보처로서 생각 안 하고
북한산성은 바로 도성을 수호하는 배후기지로
위상을 바꿔주죠
그러면서 북한산성이 도성
배후기지로 위상이 바뀌면서
탕춘대성의 성격도 변화한다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이 탕춘대 창고를 도선지원 창고로 용도를 바꾸고요
그리고 총영청을 주둔시키면서
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성곽으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산성 외성으로
도성의 안의를 저해하는 성각이라는 여론에서 벗어나서
도성 외성의 위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 도성에서
탕춘대성에서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은
영조 때에 와서야 이 도성수비성각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입니다
저는 사료를 보다 보니까
저희가 이 수성정
나중에 1751년 12월 달에 발표했는데요
반포 이제 배포가 되죠 이 수성 책자가 이것을 맨
처음에 어이 표명했던 장소가 바로 이 탕춘대 입니다
1751년 7월 영조는 탕춘대 거동에서 수성
젊어 글 반포 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편합니다
그리고 3일 뒤에 다시 수성
젊어 글 언급하면서
조금 고쳐서 책자로 만들어서 배포 해라
이런 지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수성 책자
반포 의지를 바로 탕춘대에서 표명 했다는 사실은
탕춘대 성의
그 도성 수호
성격이 이 영조 때에 와서
되게 분명해
진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영조 때에는
탕춘대 성은 북한산성 외성이 아닌
도성 수비를 상징하는 성각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이
북한산성 보다 도성과 더 가까운 지리 조건으로
총영청이 들어서면서 북한산성 보다
더 먼저 도성을 지키는 성각이 됐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도성을 지키는 제일의 성각,
도성을 빼고서
도성을 지키는 제일의 성각은 바로 탕춘대성이고요
그리고 도성, 탕춘대성,
북한산성에 있는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숙정을 거쳐서
영조가 추진한 탕춘대성
축성의 역사적 의의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인터넷으로
탕춘대성이나 이런 것들을 찾아보면
어떤 얘기가 나오냐면요 이 탕춘대성에 대한 설명이
유사시 구강의 창의문을 빠져나와서
탕춘대성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가는 피난길을 형성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얘기는 숙정 때는 맞습니다
하지만 영조 때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탕춘대성하고
북한산성을 영조 때까지도
피난성으로 인식하려고 하는 이런 부분은
사실은 영조 때의 역사적 사실하고 맞지 않습니다
영조는 도성을 수호하려고 했고
그 다음에 탕춘대성,
그 다음에 북한산성
그렇게 중층의 산성을 두고서 이 도성을 지키겠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숙종 때하고
이렇게 영조 때의 그 탕춘대성의 어떤 가치, 기능
그 다음에 성격을 좀 구분하고
그리고 이 도성
탕춘대 북한산성을 잇는 이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조 때에 비로소 완성됐다고 하는
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저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혜원 선생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잠깐 내려가지 말고
대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혜원 선생님이 탕춘대상 축성의 의의를 말씀해 주시면서
노론소론의 입장 차이 설명해 주셨고
그것이 또 당시 무신란을 통해서
2인자의 난이라고 알려진 무신란을 통해서
탕춘대가 재조명되고
그 다음에 또 영조가 그 뒤 직접 탕춘대 올라서 도성
수비의 그 도성 사수의 그 의견을 밝혔다는 점
그래서 이런 점들을 비춰 볼 때
숙종 때 탕춘대 성의 쓰임과 영조 때
탕춘대 성의 쓰임이 달랐다 라고 집 잘 짚어 주셨습니다
특히 제가 좀 공부가 좀 부족해서
그런데 탕춘대 성 쌓을 때 구성이 이미 쌓았다는 것
깜빡하고 있었는데
사실 영조 때 한양도성을 전반적으로 수축하고
성랑을 개수하고 하는 것도 구성임이 주도했고
수성책자 수성절목 만드는 것도 구성임 때
한 거기 때문에 영조의 한양도성
수비의 오른팔 같은
그런 역할을 했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진행이 매끄럽지 못해서 죄송한데요
종합토론 시간에
부득이 자리를 비워야 하시는 상황이 발생해서 어
이왕무 선생님 토론을 먼저 진행하고
종합 토론 시간에는 그 나머지 선
그 세 분 선생님의 종합 토론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경기대학교
사학과의 이왕무 교수님께서 어 토론을 해주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방금 소개받은 경기대사과의 영웅 입니다 네
그럼 바로 토론문을 읽는 곳으로
제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탕춘대성의 축성과 한양도성
배후산성의 역할에 대한 토론문
탕춘대는 조선후기 영조 때 수도 방어 체제를 정비하면서
한양도성과 북한전성을 연계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 시설입니다
군사적으로 한양도성과
북한전성이 별개의 시설로
운영되던 것을 연계시킨 매개였으므로
한양도성의 전략적 목표를 확대
재생산하게 된
실질적 전환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정혜연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탕춘대성의 역사적 기능에서도
충분하게 말씀해 주셨던 내용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정 선생님은 조선시대
군자사 연구의 대표 연구자이시면서
오늘 주제 발표에
제일 적합한 인물이라고 누구나 인정하실 겁니다
저는 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논지와 의견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제언을 드리는 것으로 이
심포지엄에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또한 근본 발표회를 통해서
탕춘대성이 지닌 역사성을 제고하는 것과 동시에
사적 승격이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 5개 정도 되는 토론인데요
하나씩 요약 정리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입니다
탕춘대성 연구가 기존에 미진했던 연구가 무엇인가를 조금
다소 확대해서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뭐 잘 아시다시피
역사 연구의 기초는
현장 조사와 사료 발굴이 기본이 겠습니다
탕춘대의 경우에
이곳에 대한 사례가 완비되지 않아서
연구가 미진했던 것인지
혹은 기존 연구에서 이미 충분한 논의가 되어서
더 이상의 연구가 진전되지 않았던 것인지를 조금
명확하게 언급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탕춘대의 역사성이 전환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거는 오늘날
현재 역사적 시각에 의해서 발생하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자칫 탕춘대 그 자체로서는 역사적 의미
혹은 해석의 한계가 있으므로
한양도성 및 북한산성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서술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탕춘대 연구사
혹은 연구 진행에 대한
보다 명확한 제시가 있었으면 합니다 두번째 입니다
탕춘대가 연계시킨 그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은 하나의 군사
방어 체계 혹은 시설로 인지해도 되는가 의 여부입니다
영 영조 때는 물론 현재의 그 한양도성
그 복원 안을 보더라도
탕춘대로 연계된 시설들은
하나로 볼 수 있는 거대한 성과 군입니다
도성 방어 성과 기라는 틀에서 본다면 은 탕춘대,
한양도성, 북한산성은 별개의 군사시설이 아닌 수도
방어망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성곽으로도
과연 설명이 가능한지 좀 의문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탕춘대가 도성과 산성을 연계하는 지리적 지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실제로, 이건 한양도성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실제로 외부적 침입에 제일 취약한 곳이었으므로
보강되었던 군사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또 관건이겠습니다
도성이 외적의 침략에
군사적으로는 점령된 사례가 없었으므로
군사적 취약점을 지리적 요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다소 좀 조심해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역으로
탕춘대의 지리적 위치가
도성 및 산성을 연계하는 오히려 약한 부분이랄까요
문제가 있는 어떤 취약점이 지점이라기보다는
요충지였다는 부분을 강조하는 게
좀 더 탕춘대의 가치를 밝히는
용이한 서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네 번째입니다
수도 방어의 전략
거점의 확보 및 재편은 예상되는 군사적 위협이
주요 원인일 것입니다
이미 선생님도 서술하셨지만
숙종되는 청나라의 내란,
영조 때는 무신난이 대표적이겠습니다
선생님도 언급하셨듯이 영조 때 무신난은 도성 사수
혹은 북한산성을 유사시
도성민의 도피처로 결정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탕춘대
축성 논의를 국내외적 군사
위협에 연계해서 주장하는 것이
성곽이라는 군사
시설로서의 성격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아까 뭐 선생님이 설명하셨지만
국내적 요인보다도 오히려 이런 군사적
외부적 요인을 좀 더 강조하는 게
탕춘대가 갖는 성곽이라는 군사
시설로서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다섯 번째는 뭐
그냥 한번 저도 연구자로서 말씀을 드리는 조금
조바심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탕춘대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것은 오늘
역사학계에서도 여전히 난점인 부분이기도 하고요
탕춘대의 구축
배경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되고
있고요 생각됩니다
그런데 과연
축조 이후의 운영 형태가 실제로 서술될 수 있을지
이거는 정말 의문입니다
저도 이 부분은 사료의 한계상
용이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혹시 이 탕춘대의 어떤 뭐 사적 승격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라도 혹시 선생님께서는 뭐 어떤 보관이 있다면
그냥 구두로도 한번 제시해 주셨으면 어떨까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그 질문 너무 감사드리고요
사실은 이 다섯 개
질문이 저의 발표에 모두 다 필요한 그런 질문이고요
특히 네 번째 같은 경우는 왜 그 성곽을 왜 쌓았느냐고
국내적 요인 말고
이제 그 대외적인 요인도 필요하다고 하는
지적은 대단히 타당한 지적이고
아주 정확한 좋은 의견이라고 저도 생각을 합니다
그냥 간단하게 지금 좀 시간도 좀 지체가 됐으니까요
제가 좀 간단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탕춘대성 연구가 미진했던 부분은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탕춘대성 연구가 사실은 한
두 편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다 요약하는 형식으로 서술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제 탕춘대성에 대한 서술이 간략한 것은
왜냐하면 북한산성하고
그다음에 도성,
영조 때는 강화성이 더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사실은 탕춘대성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은, 연구자들이 그다지 높지 않고요
그리고 사실은 탕춘대성 같은 경우는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은 이미 숙종 때 도성하고
연계 지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것은 좀 틀린 설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숙종 때는 명확하게
사실은 더 북한산성하고
연계되어서 쌓은 성이 탕춘대성이고
영조 때에 가서야 이
탕춘대성이 도성하고의 연계성을 높이는
그러한 방향으로 영조도 성을 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탕춘대성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는
사실은 탕춘대성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고 이 부분에 대해서 중요도를
기존의 연구에서 인지를 조금 덜한 부분이 있어서
저는 탕춘대성 연구가 미진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같은 경우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은 하나의 군사
방어체제 혹은 시설로 인지해도 되는지
사실 저는 제가 이번에 이 발표를 준비를 하면서
북한산성도 한번 갔다 왔고요
그다음에 탕춘대성도 한번 갔다 왔고
한양도성도 제가 이제 답사를 했습니다
한 이틀에 2주에 걸쳐서 한번 이제 그 답사를 했는데요
저는 이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요
사실 당시 숙종이나
영조 때는 지금은 이제 좀 높은 건물들이 있어서 어
지금은 이제 북한산성이 되게 멀리 보이는데요
지난주 제가 답사를 했을 때가 그 뭐
하늘이 너무 맑아 가지고요 이
그 제가 북한산성에서 도성이 정말 멀리서
가깝게 보일 정도로
그래서 저는 답사를 통해서 사실은 북한산성하고
탕춘대하고 도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저는 그렇게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저의 답사 결과들
다만 탕춘대 성을 북한산성 아래로부터 한북문을 거쳐서
결국은 이 저기 도성 아래까지 싸우려고 했다고 하는
그 시도는 되게 중요하다
결국은 이 한북문에서 도성까지의 그 성각은 아까
뭐 자료상에
50보 정도 축조하고 말았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렇게 그 하나의 그 연결하려고 했던 그 시도는
이게 하나의 성각
방어 시설이라기보다는 이 성각과 성각을 서로 연계해서
하나의 그 전반적인 군사체제 안으로
통합을 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닌가
저는 좀 그런 판단이 들어서
이게 이제 수도방어망이라고는 그
우리 논평자 선생님이 지적해
주신 이 부분은 저는 상당히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하나의 성각이냐
그건 저는 좀 아니지 않을까
이제 이렇게 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분 같은 경우는 군사적 취약점을
지리적 요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좀 조심할 부분이라고
저도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사실
이제 탕춘대에서 저는 사료만 보고서
탕춘대 성을 좀 가서요
그래서 여기가 정말 도성하고 가까울까
사실 좀 그런,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좀 들었거든요
아직은 다 이렇게 연결이 아직은 안 돼 있어 가지고요
그래서 이 북한산성과 어쨌든
도성 사이를 이으려고 했던 그 부분에서는 선생님
지적처럼 요충지였다고 하는 그 부분은
저는 상당히
아주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같은 경우는 그 대외적인 군사
위협 같은 경우는 사실은 이제 북한산성이나 북한산성
그 연구에서 사실 조금 많이 언급이 되어 있어요
왜 북한산성을 쌓았느냐
뭐 이제 그 청에서 일종의 해구를 막아라
이제 이런 어떤 공문이 도착하면서
이제 북한산성을 쌓기 시작하고
어머 이제 이런 이렇게 조금
그 이 대외적인 제 요소들이 어
이제 기존의 연구에서 뭐
좀 많이 논의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오늘 발표해서 는
조금 더 이제 탕춘대 성에 좀 집중을 하면서
이제 이 부분을 이제 반영을 못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도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대외적인 요소가
저는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같은 경우는 사실
제 발표문을 보시면 거기 주 몇 번이냐면요 아, 잠깐만요
아, 뒤에 그 창고문원에요
창고문원에 어디에 그 명지대학교 석사학
2016년에 그 이윤주 선생님이 조선 후기
탕춘대성 축성과 연웅대 공간의 성격
변화 라고 하는 어이
석사학의 눈물을 언제 제출을 했는데요
여기를 보면 이제 앞부분은 사실은 어
우리가 이제 기존의 뭐 북한산 성인이 도성인 이
그런 관련된 이제 영구
그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뒷부분 여 뒷부분에서 이 그 창춘대가 연흉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여기서 영조도 거둥을 하고
그 다음에 영조 때 말고
정조 순조 때 여기서 각종 제사,
제의 여러 가지 활용되었던 여러 가지 사례들을 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도 이 석사 논문을 보기 전에는
그 부분을 자료를 좀 정리를 하다가
이미 이 석사 논문에서
좀 이미 정리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저는 그 부분을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은 이제 오늘
그 이 사적을 준비하시는
우리 선생님들께서 이 석사학의 논문
뒷부분을 참조하신다면
사실 탕춘대성이 군사 기지로서 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군사 훈련장 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각종 어떤 제의 뭐 그 다음에 어
그리고 특 특히 탕춘대 같은 경우는 도성하고 가깝고
그 다음에 여기 창고가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이미 영조 때부터 숙종 때도 그렇고요
환자 그 다음에 어떤 각종 재난에 흉년이 들었다거나
아니면 수혜가 났다거나 했을 때
백성들한테 곡식을 나눠주거나
그 다음에 죽을 끓여서 주는 장소로도 이
탕춘대가 활용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어쩜 기왕에 연구
성과가 잘 돼 있기 때문에
제가 굳이 해 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4 이상입니다
예 교수님 추가적인 7분 있으시면
시간 관계상 짧게 여가 좀 내장 할 말이 없습니다 4
어 발표와 토론을 맡아 주신 두 분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 다음 발표는 탕춘대성과 홍지문
명칭에 대한 고찰 이라는 주제로 기호철
문화유산연구소 길
소장님께서 발표를 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교체입니다
저는 그 정현생께서
역사적 요소들을 잘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 오늘날 부르고 있는 탕춘대성이라고 하는 이름
그리고 탕춘대
서쪽을 지키고 있는
홍지문이라고 하는 이름이 과연 적절한지
그리고 서울시에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사적으로 지정하고
이후에 북한산성
한양도성과 더불어서
셋을 하나로 묶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데
필요한 명칭 문제를 정리하는 걸 주안점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현재 서울특별시 위험
문화재 33호로 되어 있는데
제목이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정할 때 요소들은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숙종 41년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강대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뭐 나머지 내용은 크게 문제 될 건 없는데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 정확한 표현이냐
하는 것들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탕춘대성은 1719년에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중단되었습니다 완성하지 못한 채 중지되었고
영조되어 완성되었습니다
아까 정희원 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셨는데
이때 44년 사타가 중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숙종이 건강으로
경종이 섭정하고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경종의 뜻이 반영되어 있었는데
그러면서 정지가 됐습니다
영조는 아까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무신란을 겪고 나서
더욱더 탕춘대성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조선에서 특히 도성을 방어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는 효종 때부터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었고
그리고 이관왜란 때 또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죠
그리고 병자와란 때 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효종은 송시열에게
은밀한 교지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비롯돼 가지고 이게 만들어지는 것인데
숙종 때 이게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냐면
당시 국제적인 정세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나라에서는 당시에 오삼계난이라고 하는 명나라
부흥운동을 빌미로 하는 반란들이 일어나서
청나라가 조선에 그다지 신경 쓸 상황이 못됐습니다
그런데 또 조선은 은밀하게
그 반란군들을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오산계난이 평정되고 나니까
가장 크게 문제가 생긴 것은
다시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송시열이 상속을 올리던 그 해에
청나라에서 가장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되는데
태종에 둘째 정실인 효장문왕후가 죽게 되죠
우리나라 숙종실록에는 효장문왕후가 죽었다
해놓고 비상이 걸립니다
효장문왕후는 실질적으로
그 뒤에 순치제라든지
하는 임금들은 껍데기로 만든 실권자였습니다
근데 우리 조선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면서
송치여를 소환하라고 할 때도
계속 효장문왕후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그걸 무마해왔었거든요
그런데 죽어버리니까 끈떨어진 연이 된 겁니다
그래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숙종은 전국에 걸쳐서 성을 무진장 쌓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남한산성으로 도망
병자원한테처럼 도망가느냐
또 강화도로 가느냐 이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숙종은 효종이 생각했던 효종은
그래서 당시에 생각했던 건 뭐냐면
북한산성과 탕춘대
일대의 성을 쌓아서 도성민과 함께 지키고자 했으나
어려워서 쌓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그 계획들이 그 당시에 만들어지면서
숙종이 몰아붙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도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성으로 만들 때
여러 가지 대안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북한산성을 만들자 두 번째는 탕춘대에 성을 쌓자
세 번째는 남산에다가 성을 쌓자
네 번째는 의정부에
홍복산성을 쌓자 라고 하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
그 가운데 숙종이 북한산성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만들다 보니까
문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군량미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큰 산성들이 대부분 산창이 있고
평창 하창이 있듯이 평상시에는 평지에다 군량을 보관하고
전시에 끌어올려서
도성민이 들어가서
농성전을 벌이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북한산성을 만들어 놓고 보니까
완성될 때쯤 되니까 군량미가 문제가 된 겁니다
그래서 곧바로 탕춘대에 평창 지금
오늘날 평창동 일대에 창고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고를 만들게 되면 또 문제가 뭐냐
그 창고를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또 성이 다시 또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홍지문이라고 한 것과 거기에 오관수문
그리고 좌우에 성벽이 있는 익성
날개를 펼친 것 같은
그런 것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게 아까
말씀드렸던 선생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1700..
그러나 중지되었던 성들은 실질적으로는 영조
29년과 30년에 실지로 만들어집니다
숙종 때 쌓은 성은 높이도 낮았거니와
토성과 그 다음에 잡석으로 그냥 담을 둘러친 정도
그리고 오늘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각터널 위쪽에 포토소를 중심으로 해서
그쪽에 자연지세를 이용하되 토성을 쌓았습니다
이유가 그래서 오늘날 제대로 파악은 안 돼 있습니다
그래서 토성을 쌓았던 구간도 의외로 깁니다
그래서 이제 1754년이면 거의 됩니다
그래서 아까 정의원 선생님께서 일보가 얼마냐 했는데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일보 하면 75CM라고 하시죠
조선에서는 한 걸음이 아니고 두 걸음이 일보입니다 1
.5M 그래서 조선의 일리는 4KM가 아니고 약 4
.5KM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게 실제로 쌓았던 것들을 보면은 1200
영조 때 쌓았던 게 1263보
그 다음에 안문
지금 홍지문에서
상명대 뒤쪽에 가면 성눌루가 없는 문이 하나 있는데
안문 이것도 실질적으로
영조고 때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숙종 때 만든 게 아니었고
그래서 여기 보면 새로 쌓은 것
그러니까 숙종 때 만든 게 아니고
새로 쌓은 것이 659보고
애성을 더 쌓은 것이 649보 실제로
새로 쌓은 게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지세에 따라서
한 길에서 한 길 반 높이로 쌓았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보면
탕춘대성부터
향림봉 기록에 따라서는 상림봉으로도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400보
그 다음에 여장 및 암탉을 보수하는 등을 맞춰서 오늘날
홍지문에서부터 향림봉에 이르는 성벽은 이때 완성되었고
하지만 한북남쪽에서 인왕산의 도성 아래에 이르는 구간
1400보는 50보 정도밖에 못 쌓았다
그리고 이 뒤에 더 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쌓을 필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이것들이 다 완성되자마자
이미 총청도 옮겼죠
그래서 10월 1일 날
탕춘대라는 이름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연흉대라고 이름을 고치게 됩니다
그래서 문헌의 성은 어떻게 표현되냐면 탕춘대성, 탕춘성,
탕춘서성, 탕춘외성,
연흉서성 그와 같은 표현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축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까 좀 살펴봤지만
이게 연상군 때 탕춘대 오늘날 그 아파트가 들어서 있죠
그래서 탕춘대 세검정
뒤쪽 언덕배기 아파트가 탕춘대입니다
그래서 그 꼭대기에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에
탕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상징하는 지명이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지역을 상징하는 이름이 탕춘대였기 때문에
탕춘대성이라고 보통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축조의 시작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효종이 1657년에
송씨에게 내린 밀물교시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효종은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또 조지서의 골짜기
어귀를 막으려고 한 것은 난리가 닥쳤을 때
이곳에 이어하면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이 모두 보존하여
무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1694년 숙종 20년에 상소로
이를 아랜 것은 당시에 정세가 아주 긴박했기 때문에
청나라의 재침 위기가 닥쳤기 때문에 했던 것인데
바로 실행되지는 못하고
1702년에 우의정 신환이 건의를 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화는 북한산성에 싸차는 게 아니고
탕춘대에 싸차고 건의를 했었고
이걸 실제로 숙종이 결정하고
밀어붙인 사람은 이 .유 라고 하는 분이 했고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듬해 행궁을 완성하고
중성을 쌓게 해서
그 1714년에는 중성문까지 완성이 됩니다 이
11년에서 해가지고
행궁이 완성되던 그 해
그 해부터 시작해서 바로 문제가 생긴 게 뭐냐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굴양민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바로 1712년부터 창고를 만들기 시작해서
3월에 창고가 완공되고
창고가 완공되니까 한복문을 개건 건립이 아니고
고쳐지은 거예요
개건하고 또 좌우익성을 축적하는데
1719년 아까 말씀드린도 2월 2일 날
경종이 대리청정하던 그 시기에 중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조는 탕춘대성을 완성하고
보성방어 지휘소로 삼았습니다
아까 정희원
선생님께서 상당히 소상히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진 않겠는데
영조의 생각은 국왕이 시민과 함께
도성을 지키겠다는 방어체계를 확고히 하기로
함에 따라 북한산성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수성윤흄, 수성절목에 보면 삼군문 붕괴지도가 있죠
그래서 도성과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하나의 세트로 보고
삼군문에서 각각의 섹터
담당 구역을
어떻게 관할해서
지킬 것인가에 대한 세부계획들이 만들어지는데
그걸 군사기밀이 아니고 대국민 공포를 한 겁니다
그건 뭐냐면 전란이 일어나도 임금인 나는 도망가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도성을 지키겠노라고 하는 대국민 선언인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있었고
그래서 탕춘대성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는데
도성과 호응하기 쉽지 않아서
전란때 북한산성을 활용하려면 탕춘대에
성이 없으면 탕춘대로
외적이 들어오면 북한산성과 도성이 끊겨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서로 간에 고립되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또
영조는 탕춘대에 성을 쌓아서
도성과 대남문을 잇는 길을 마련하고
총영청과 경의청을 그 안에 두어서
북한산성과 호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전남 때 대남문
북한산성으로 갈 수 있는 도성에서 갈 수 있는
길을 숙정문을 지나가서
지금 현재 부각터널 위인 보토소를 지나가서
오늘날 형제봉이라고 되어 있는 원래 이름은 구준봉이죠
구준봉을 지나서 대남문으로 가는 길
그걸 대남물로라고 해서 연이 갈 수 있는 길로 구축하고
또 실제 그때 구축되어 있었고
숙종 때 토성을 쌓으면서
길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고 기록 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시스템 을 구축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2년에는 도성을 수비 할 계책을 논의하고
수성절목을 작성하고
호조와 선해청 및 여러 군문의 창고를
차례차례 성 안으로 옮기도록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탕춘대성이 축조되니까
탕춘대를 총용청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됐는데
이전에는 보통 탕춘대 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탕춘대 일대의 지명이 과연 어떻게 됐는지
지명변천을 알아보면
조선 초기는 오늘날
세검정촌학교에 장이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장이사동이라고 불렀고
장이사의 사가 없이 장이동이라고 하면 또 저기 뭐예요
지금 효자동 있는데
그쪽도 장이동이기 때문에
구분이 잘 안되는 실록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희동이 지금 어디냐면
장동 장희동이 줄어서 장동
김씨가 살던 청와대 후문 들어가는데 궁정동 있는 곳
그곳이 장동인데 거기도 장희동입니다
그래서 이제 연상군이 세검정
초등학교 일때 있었던 장이사를 흘리고
조 지서 조지서는 세검정
초등학교 에서 그 옆에 신영
삼거리 도로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지서를 홍재원 위로 옮기면서
홍재원 위로 옮겼다가
중종 초에 다시 원위치 시킵니다
옮기면서 탕춘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인문박 조지서 터에 이 궁 이 궁은 별궁이죠
지으려다가 시작 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 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 을 세워 황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화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또 정자는 장이사 서평기둥
우뚝 솟은 꼭대기에 있는데 청유리 기화로 이었으며
위아래 가로 놓인 무각이 뇌물을 수백
고나 걸쳐 있었는데
모두 청유리 기화로 이고 뇌를 막아서 저수하였다
산 안팎에서는 다 구겨나를 심고
그 정자 이름을 탕춘정이라고 했다라고 했는데
근데 중종소에 조지서를 다시 설치하면서
이제는 조지서 동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장이 사동 조지서
뭐 왜 다시 장이 사동으로 부르지 않냐
면 장이 산 없애 버려서 다시 복구가 안 됐거든요
그래서 탕춘대 이제 새로운 이름이 총형척을 옮기게 되자
총형 청은 탕춘대에 있는 분양 이라는 것으로
탕춘형 이라고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총릉청이 임금님에게 올린 계사에 보면은 탕춘영
서쪽 성을 쌓는 일은 이달
6일부터 시작하여 다시 이때여 쌓겠습니다
그래서 탕춘영이라고
스스로 탕춘영이라고 보고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제 임금을 건드린 거죠
그래서 영조가 이름을 바꾸게 됐는데
신록에 있는 것과 승정원에게 있는 게 좀 다른데
승정원에게 있는 게 좀 상세해서 다 번역을 했습니다
상의를 이르기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는다고 하셨고
반듯하지 않으면 드시지 않으셨으니
성인의 가르침에 있는 바이다
탕춘대라는 명칭은 그 이름이 올바르지 않아
옛날에는 여대 천인이나 말하는 이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경영을 설치했고
총영청을 말하죠
입다금 칠림하기도 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연흉대 라고 이름을 고쳐 써서 내려 이를 총영
책에 개시 하였으니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부르고
다시는 탕춘 두 글자를 읽지 마라
이제 그 뒤에는 다른 건데
음식 이름도 바로 잡습니다
양명과 라고 하는 과자가 있는데
그것도 이름이 바르지 못하니까
고쳐라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탕춘대
새로운 이름이 연흉대라고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에 영주가 했던 말은 자로가 공자에게 위나라
임금이 했던 거
그래서 피리아 정명호라고 했던 그 말과
그다음에 공자께서
고기를 반듯하게 자르지 않으면 드시지 않고 안았고
양념장이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드시지 않았다 라고 하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협하하면서
탕춘이라는 올바르지 않은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천명한 연상군이 탕춘장을 짓고
탕춘대라고 이름 지은 뜻은 전하지 않아서
무슨 뜻으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뭐 호탕춘광 뭐 담탕춘광 뭐 그런 의미
즉 가없는 곰경치
훌륭한 곰경치를 가졌다고 해서 탕춘이라고 지었을 겁니다
거의 99
% 그런데 영조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옛날에는 천인이나 말하는 이름이라고
하고 탕춘을 연융이라고
한 것은 뜻이 이 연상군이 함부로
음탕한 짓을 벌일 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영전은 탕춘이
임금이 음황한 짓거리 음탕한 짓을 벌이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 대부분의 백성들도
그런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고
오늘날 탕춘이라고 하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대부분 이 뜻으로 알고 있죠
그래서 탕춘을 연상군이 방탕하게
춘색에 빠졌다라고 하는 의미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산성을 총영청에 맡겨서
도성을 수호하는 나라의 원대한계 이게 북한속지총영,
수도성, 국지대계
이게 영조가 천명한 탕춘대성의 큰 목표입니다
이게 대위기거든요
그래서 총영청을 탕춘대성에 넣었지만
북한산성을 관장하는 겁니다
탕춘대성은 탕춘대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북한산성이 지휘소입니다
북한산성을 지휘하는 지휘소 역할을 해서
도성을 지키는 나라의 대계를 삼았기 때문에
탕춘대가 되는 것이죠
이후에는 대전통편이나 대전회통, 전율통보,
충관통보, 육전조례,
만기호라, 문대평고
같은 법전이나
국가공식문서에 모두 연흉대로 쓰이게 됩니다
그런데 동국여도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도성, 연흉,
북한 합도 도성과 연흉대와
북한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 이게
도성의 방어선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삼국문을 중심으로 이 도성을
도성민과 임금이 피난 가지 않고
함께 지키겠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그리고 이 도성도를 보면
여기에는 경복궁이 복원되기 전이죠
그래서 이게 탕춘대, 이 빨간색으로 된 건 다 길입니다
길이고 여기에 연흉대라고 돼 있고
백악산 그리고 이쪽에 한북문도 있고
그래서 북한산성 이렇게 되어 있고
그다음에 북한성도 북한산성도 이렇게 그려져 있죠
그리고 또 연흉대도 해가지고
연흉대가 이렇게 그려져 있고
연흉대에 보면 여기에 한북문,
그 다음에 오간수문,
그리고 총융청, 조지서 이런 것들이 이렇게 그려진
그래서 이쪽으로 이어지는 길들도 표시가 돼 있죠
그런데 이와 똑같은 지도가 하나 또 있습니다
일본의 경도대학
가와이문고에 좌회여지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의 그림은 똑같지만
이건 더 느립니다 경복궁이 복원된 이후에 그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까는 따로 다르게 도성
연흉대에서 대자가 하나 더 들어갔죠
북한 산성에서 산성이 더 들어가고
합도라고 하는 이름이 붙어있고
거의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걸 펼치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경복궁도 복원되어 있죠
여기도 경복궁이 복원되어 있고
여기는 또 아까 도성도가 아니고 한양도성도로 되어 있고
그리고 한양의 지세에 대한 설명이 추가로 더 붙어 있고
이런 식이죠
또 북한산성도 이게 온전한 이름으로 다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연흉대도 여기에는 성자가 없죠
그리고 연흉대도도 한북문 조지서
이건 조지서가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조지서현입니다
다른 지도하고 보면
여기서 창의문 쪽으로 가는 그 고개를 조지서 고개
그래서 조지서현인데
여기 현자가 빠진 거고요
그리고 안문
이런 것들이 표시가 되어 있는 펼치면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연흉대 연흉대성 연흉서성
그래서 동국여도는 이름을 추격해서 썼고
좌에 이어지는 온전한 명칭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양도성, 연흉대,
북한산성이 그 온전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흉대는 성자가 안 들어가요
그 이유는 탕춘대를 연흉대라고 고쳤음에도
문헌에는 연흉대성
또는 연흉성이라는 표기는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연흉대서성
또는 연흉서성이라는 것만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유가 무엇이냐
그래서 이게 연흉대 서쪽에 있는 성
연흉대 서쪽에 있는 성이라고 하는 뜻만 쓰지
연흉대 성 연흉 성이라고는 잘 안 쓴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연흉대라고 하는 것은 도성방어에
지휘 사령부 기 때문에
그걸 선거하게 개념을 안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동국여도와 좌회여지의실련연흥대는 모두 성벽
부근에 연흉서성이라고 쓰여있는게 있고
그래서 총영청을 이사를 하며
총영사가 북한산성까지 지휘하여
연흉대가 종합지휘소 역할을 했으므로
성이라는 의미보다는
지휘소라는 의미의 연흉대를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만 지칭할 때는 연흉대
서쪽이라는 성이라는 뜻을 담아서
연흉대 서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동국여도에 보면 연흉서성
연흉서성 적혀있죠
그리고 좌여지여도 보면 연흉서성 안문 이렇게 적혀있죠
그리고 이 탕춘대라고 부르는 지금
세검정이 있는 바로
그 뒤편 도로 있는 곳에
연흉대라고 하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이게 1939년 기사 라든지
거기에 보면
이제 거기에 보면 영조 30년의 홍상서 홍봉안입니다
홍봉안이 쓴 글씨라고 되어 있고
또 영조 때 문인인 김상체가 보면 갑술령 가을
탕춘대를 연영되라고 적은 사실을 어필로 써서
총릉청에 그렇고
또 소공동 홍상서 홍봉안에게 마찬가지로
탕춘대 바위에 쓰라고
명하였다고 해서 이
바위가 새겨져 있는 게 써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이게 딱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사진이 이겁니다
여기에 보면 연흉대 가로열고 탕친대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써져있는데
그래서 바위가 이렇게 서 있는 것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입석이라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돌 그래서 이게 그럼 언제 사라졌느냐
이게 도로를 낼 때
도로를 확장하면서 1960년대에 이게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춘대 성이라고 하는 이름은 영조의 뜻과 달리
익은 이름이어서 식살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탕춘대라는 용어도 여전히 함께 사용했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숭례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남대문이라고 부르고 흥인지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동대문이라고 일반인이 부르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정조 때 일이 내용에 쓰여 있어서
그 이후에 편찬된 것을 수정하는 동국여지비고
고내 한성구 관방에는 탕춘대성을 표제로 쓰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이렇게 많이 썼느냐
이게 예외적인 사례고요
그리고 서성이라고 하는 곳을
그동안의 연구자들이 다른 이름은 서성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그건 사료를 똑바로 보지 못해서입니다
서성은 화자가 중심으로 삼은 곳
서쪽에 있는 성이라는 뜻으로 보통 쓰이는데
서성이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구를 중심으로 말할 때
서성이라고 하면
한양도성의 인왕상 부관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탕춘대성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만 이때 내용 중에 반드시 탕춘, 연흉,
조지서 등이 먼저 언급되거나
중심이 그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앞서
나와 있을 때만
이렇게 한다고 하는 것을 알아두셔야 됩니다
그래서 문장을 전체를 봐야지
서성만 떼어서 보면 논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헌에 나타나는 서성은 탕춘대성이나
연흉대만을 한정하는 이름은 결코 되지 못합니다
연구자들은 해당 것에서 떼어서 하는
잘못들이 범해졌다는 것이죠
그 다음이 홍신문입니다
이게 가장 문제인데
1980년에 21년 홍수에 오관
대수문과 그치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고
오늘날에 걸려있는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입니다
그래서 숙종 40일 전에
숙종이 친히 홍시문이라고 써서 현판을 걸었다고 하지만
근거할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숙종이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면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겼을 것인데
열수동 의제의 숙종에 관한 모든 글이라든지
그래서 전혀 없고
모든 기록 한복문이라고 써진 것은
기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천 건이 넘기 때문에 아예 사례를 들지 않은 겁니다
모두가 그렇게 나타납니다
더구나 그 건립 시기도 정확하지 않고
또 고지도 또 그쪽에 한복문이나
세금전을 그린 곳에 보면
그림 위에 한복문이라고 글자까지 써놨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도 모두 한복문에 돼 있고
그 다음에 심지어는 홍지문 안 서쪽 무사석
바로 윗돌에는 세로로 그동안 판독을 못했는데
한복문이라고 세 글자가 바위에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제가 사진을 몇 번 찍었는데
사진 정리를 못해서 아직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건립시기와
명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새로 찾을 수 있었는데
총리형 사례에 보면 한복문 쪽으로 두 주가 있습니다
이렇게 충영살이 있는데 이 밑에
한복문에 있는 내용을 더 보완해서
당시에 적은 내용이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에 내용을 보면 한복문은 창인박 서쪽 일리에 있다
숙종 개사 년 1713년에 고쳐지었으며
개건이에요 을미년
숙종 41년에 비로소 좌우 익성을 쌓았다
고축한 높이 쌓은 곳이 80보
그 다음에 차 고축
그보다 조금 더 높이 쌓은 곳이 30보
반만 쌓은 곳이 82보이다
성문은 15보이며
물루가 8칸이다
수문은 5칸을 합하면 20보이다
일을 시작해서 끝낼 때까지 6달 만에 일을 마쳤다
그러니까 여기
익성과 오관수문 만든 것을
6달 만에 끝냈다는 얘기입니다
초루, 여기에는 물루를 초루라고 합니다
초루에 여기에 이제 있죠
인족께서 지은
한북문에 올라서라는 등한북문이라는 현판이 걸렸으니
여기 내용이 그대로 있어요
오래전 이 문에서 쉬었던 게 엔일인데
오늘도 문에 오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접대의 일을 추억하니
내 마음 긴절하여 붓을 휘둘러 한북문이라고 명명하노라
한북문이라고 하는 이름을 정면현 인조
5년인 1622년 10월 3일 날
이렇게 인조가 올라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 보면은 그 전날과 그 다음날은 승정원
일기에 모두 일정이 있는데 이 날은 아무 일정도 없어서
기사가 전혀 없어서 아마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쓰여 있죠
그래서 이 내용을 보면
숙종 39년에 한복문을 고쳐 지었다
개건했다고 했으니 그 이전에도 문이 있었고
숙종 41년에는 한복문이 아닌 좌우 입성을 쌓았고
물류에는 이런 현판이 이미 있었고
그래서 왕에 오른 지
5년째 이문을 찾은 인조는
오래전에 올랐던 일을 회상하면서
직접 한복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일은 최소한 인조반정
또는 그 이전 잠져때 일일 것이니
광해군 때에도 있었던 문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1900년 이전 기록에서 홍지문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홍지라는 용어도
정야경의 경세유표에
홍지방이라고 하는 지명을 대안으로 제시한 게 있는데
이것도 이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실제로 이게 시행되지도 않은 것이고
주례에 따라서
정야경이 나름대로
머릿속에서만 창하는 것이 실제로 쓰이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홍지문이라는 이름은 과연 어떻게 되느냐
가보경장 때 제정된 동 이름에 따르면
상평방 경위청계 안에
홍지내동 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고
1977년 동아일보 있는데 저는 못 찾았습니다
홍지내동이라고 적힌 게 있다는 신문기사가 있는데
저는 이 기사를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또 6
.23년 1909년 4월 12일에 관보 에 보면 연음방
홍재원동 사통 7호 여기는 또 홍재원 동이라고도 있죠
그래서 홍지원과 홍재원과 홍지내동
홍지내동 홍재 내동 이게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아마 저는 이게 와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런데 1909년 11월
대한매일신보 광고에 보면 이렇게 있습니다
창의무박 홍지문안 15통
5호에 문건을 잃어버렸으니까 간다는 여기에 보면
창의문 외 홍지문
이렇게 되어 있어서 쓰인 사례도 보입니다
그러면 이때는 있었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종합하면 이미 5부
35방 8면제
시행되기 전에 한복문이 홍지문이라는 이름으로 쓰였고
1914년 고양시
은평면 홍지리가 되기 전에
홍지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신문들에는 한북문하고
일명 홍지문이라고 모두 기사가 똑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도 다른 이름이 홍지문이라고만 됐고
그리고 1975년
연말에 신문들이 이 역을 들여
한북문과 오관수문을 복원하게 된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립니다
이때는 한북문과 오관수문을 복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또 다른 이름은 홍지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6월 23일 날
서울시는 홍지문 및 탕추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주를 지정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복원구사를 했던 76년 8월
11일 기사에 가면 모두 홍진문과 오간대수문
복원 착공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애초에 한북문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착공할 때는 홍진문으로
슬그머니 바뀐 것은 서울시가 유형문화재를 지정했다
그래서 한북문 오간수문 복원계획도라고 돼있죠
원래 최초에 만들기 시작할 땐 한북문
오간수문 복원계획도로 했는데
공사를 시행하는 단계로 가면 여기에 보면
홍지문 및 탕춘대성 보공공사로
설계도도 이름이 바뀌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 제목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문화지청 명칭의 탕춘대성이 일부인
홍지문이 앞으로 놓인 사례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탕춘대성의 홍지문이
홍지문의 탕춘대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라고 하는 역전현상이 나타난 것은
문화재 명칭 가운데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것 가운데 오산
독상성과 세마대지가 한 유적 안에
두 이름으로 쓰는 유일한 사례이므로 이 기준을 따른다면
탕춘대성과 홍지문으로 써야 되게 오를 것이고
사적인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안에 있는 행궁지와 행궁은
사적 내에서 다시 사적으로 지정된 사례인데
그런 사례들이 그 다음에 성곽을 사정으로 지적할 때
명칭은 지명 플러스 성 이름 그래서 부여 부소산성 공주
공산성 고향 행주산성 등인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강화산성 세 곳은 따로
지명을 쓰지 않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서울 탕춘대성 또는 탕춘대성이 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탕춘대성은 공식 명칭이 아니라
연흉대가 공식 명칭입니다
그래서 문화재는 본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 게 원칙인데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남대문과 숭례문이라고 하고
남대문과 동대문이라고 하고
그렇게 부른지가 위구해도
서울 숭례문과 서울흥림집문이라는 제목으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고
심지어 탕춘대성과 접한 북악산도 서울
백악산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입니다
그래서 서울
연흉대성 또는 연흉대성을 표현대로 삼아야 옳고
근데 연흉대라고 하면 총영청이 중심이 돼서 성과까지
아울러 표현해서 연흉대성으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만약에 이게
탕춘대라는 익숙한 이름을 굳이 쓰고자 한다면
연흉대성 가로열고
탕춘대성으로 쓰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4 기호 처생 감사합니다 아
1976년도 에 서울시가 명칭 지정을 좀 이상하게
한 바람에 그동안
홍지문 및 상천 대상으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연흉대성 또는 연흉대성 가로치고
탕춘대성 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어 재원 이셨습니다
어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주셨고
특히 충흥청 사례에 등장한 한북문의 이름은
특히 한북문 일대에
광해군 때부터 어떤 시설이 있었다라는 것을
아마 학계 최초로 제시하고 계신 것 같은데
굉장히 뜻깊은 발표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청나라 효장문왕후 사국에 친조선파들이 제거되고
거기에 따라서 청의 외압이 증가할 것이라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숙종 때 관방론이 증가됐다
이런 지적도 매우 참신한 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기호철 선생님의 발표에 대해서는 종합토론 시간에
한국국방안보포럼 김병윤 선생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다음은 문헌과 시각자료로 보는 탕춘대성
일대의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실 대학교
김영수 교수님께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어 발표 시간은
지금부터 30분 동안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김영수 입니다
제가 발표 시간이 하는 30분 인데요
사실은 좀 슬라이드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좀 빠르게 좀 슬라이드를 넘겨 가면서
어 지금 발표를 드리겠구요
앞서서 두 분의 선생님들이 발표해 주신
역사 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제 발표 때는 사실
저는 굉장히 여러 번 답사를 했거든요
그리고 사진을 촬영해서 이번 발표에 소개를 드리니까
그 발표 두 분이 선생님 발표와 연관해서
슬라이드를 보시면 조금 더 흥미롭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제 두 파트로 나눠서 발표를 드릴 건데요
첫 번째는 탕춘대성의 역사와 변천,
그것은 두 분이
선생님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에
좀 짧게 넘어갔고요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하는 부분만 짚어서
좀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두 번째 파트는
오늘날의 탕춘대성이
어떤 현황을 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부분을 좀
강조드릴 거고요
미리 말씀드리면
탕춘대성을 지금 앞서서
저희가 서성, 서쪽에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서쪽에 맞은편에 있는 동쪽 부분에도
보토를 통해서
토축을 통해서
흙과 돌을 쌓아서
자연지형을 활용한 동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문헌상에 동성이라고 명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쪽에
지형의 능선을 관리했던
사실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탕춘대성
그러니까 연흉대성이라고 부르는 이 내부의 공간
연흉대라고 하는 내부의 공간이 관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성과 동성으로 아우러서 위호되는 공간
위호되는 방어 시설이 필요하겠다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한번 확인해 보시면
아 현황에서 이런 모습을 띄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셔서
이것들을 좀 충분히 타당하구나
하는 것들을 인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립니다
제 발표 때 인문적 가치
그래서 거창해서
그냥 특징과 가치 정도로만 제가 지금 정리를 했는데
결론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면
크게 탕춘대성이 갖고 있는 가치가 한 네 가지 정도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그 이외에도 더 가치가 있겠죠
그 부분을 좀 먼저 말씀드리고
이것을 슬라이드를 통해서
물리적으로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탕춘대성은 한반도
성곽춘선의 전통과 우리 앞서 발표한 것처럼
선조들의 지혜가 축적된 유산이다
이게 굉장히 탕춘대성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의들이 있었고
이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탕춘대성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성벽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고
굉장한 시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부분을 생각해 봤고요
탕춘대성을 탐방해 보시면 알겠지만
굉장히 자연지형이라고 하는 것들을 존중하고
이것들을 유기적으로
인공물과 연결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이 탕춘대성이 갖고 있는 가치 중에 하나고요
그리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자연 지형을 아주 철저하게 잘 활용했다
이건 굉장히 지혜죠
탕춘대성을 탕춘대성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고요
한양도성, 탕춘대성
그리고 북한산성을 이어서 생각할 때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이게
단시일만에 이렇게 성곽을 쌓을 수 있었을까
이거 지형의 활용
측면에서 굉장히 지혜로웠다라고 하는 거예요
한양도성이 1396년 단지 전반기 후반기 49일
두 번에 걸쳐서 98일 만에 18
.6KM를 쌓았고요
그리고 북한산성은 11
.6KM입니다 이거는 6개월 만에 쌓았어요
그리고 물론 탕춘대성은 서성 부분이 5
.1KM 그리고 제가 오늘 발표드리고
확인해드릴 동쪽에 있는 보토부분
또 토축부분이 또 4
.8KM입니다 9
.9KM인데 이게 물론
시점은 앞서 발표해 준
두 선생님이 1718년부터 1754년
이렇게 얘기를 하시지만
그 실제로 쌓는 시점을 좀 보시면 굉장히 짧아요
이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형을 활용했다라는 측면입니다
둘째는 600년이 제가 600년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은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항몽으로
하나의 그 성곽의 체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고요 이
역사적 층위를 담고 있는 유산자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세 번째는 사실
18세기 조선 후기 때 이 세 개의 성들이 합쳐져서
성곽군을 이루면서
아주 독창적인 도성 방위
체계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뒤에 가서 슬라이드 보시면 알겠지만
한양도성, 북한산성,
연흉대성이, 탕춘대성이 이렇게 보시면
고리 모양으로 계속 연결돼 있거든요
아주 독창적인 유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18세기에 우리가 좀 특이한 유형
조선 한반도의 특이한 유령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는 또 가치가 있겠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는 제가 앞서서 여러 선생님들이 얘기하시고
서울시에서 팀장님, 법무장님이 얘기해 주셨지만
지금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묶어서
사실은 세계유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것들이
세계유산에 추진된다고 하면 이 가치를
우리 당이 한국뿐이 아니고
세계인들이 공유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탕춘대성이 이제 가깝게는 사적으로 등재되고
멀게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고 하면
그 가치가 계속 더 증폭되고
연장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저희가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해봤습니다
본격적으로 슬라이드를 보시면서 이것들을 위치나
이런 것들을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사실은 지금
세 개의 유산들은 서울과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경기도는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하고 있는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은 대부분이
사실은 서울에 포함되어 있지만
오늘 얘기할 향로봉,
향림봉이라고 불렀던 향로봉으로부터 문수봉까지
이어지는 일부는 사실은 고양시
덕양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걸쳐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 좀 슬라이드 보시면 이렇게 위치하고 있고요
앞서 얘기한 대로
저희가 단순하게
탕춘대성 혼자 존립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측면은
앞서 두 분이
선생님들이 너무 강조해서 잘 말씀해 주셨죠
한양도성과 탕춘대성
그리고 북한산성은 한 몸이다
하나의 유기체로
18세기에 완성된 도성
수비체계에 결정체를 보여준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고요 이 부분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양도성은 1396년에 축성됐고요
사실은 북한산성은 말씀드린 대로 1711년
그리고 오늘 발표에서 사실은 이 시점에 논란이 있는데
사실은 그게 틀렸다라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사실은
탕춘대성이 연흉대성이라고 불렀던
탕춘대성이 1715년으로 본 거고요
그런데 기우철 선생님이
한복문의 건설 시점이
1713년이라고 하면 그게 좀 앞당겨질 수 있겠죠
제가 왜 그러냐면
사실은 한복문과 그 익성도
사실은 저는 탕춘대성의 일부라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1718년에 성벽이 쌓아지긴 했지만
한복문의 건설
시점과 익성이 만들어진 그 시점부터 라고 본다라고 하면
적어도 오늘 기호철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대로
1713년 또는 1715년부터
탕춘대성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좀
적절하지 않을까 이 점은
좀 앞으로도 좀 논의가 필요하지만
당연히 지금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게
홍지문과 탕춘대성이 묶여 있기 때문에
저는 그 시점을 좀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시면요 이 탕춘대성과 북한 선생의 입지나
이런 부분들이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앞서서 도성 연융
북한 합도라고 하는 19세기 지도를 또 보셨기 때문에
이렇게 보시면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여기 안 보이네요
중간에 이렇게 위치하고 있는
탕춘대성의 지금 모습을 볼 수가 있고요
저희가 여기서 강조해서 볼 부분은 서성이라고 하는
저렇게 인공적으로 석성으로 돼 있는 낮은 편에
아주 자연의 능선들이
이렇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사진을 보시면 여기는 백악산
그러니까 북한산의 북쪽에 있는 백악산의 곡성이 있는데
곡성부터 시작해서 구준봉
그리고 북쪽으로 형제봉
그리고 다시 보현봉,
문수봉으로 연결되는
아주 능선들이 연결되어 있는 능선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보토서라고 불렀던
보토현이 있는 토축된 동성의 부분이다
이런 부분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경조호부도 고산자
김정우 선생님이 그렸던 지도에도
이렇게 보시면 안쪽에 있는 이쪽에
톱니 모양으로 생겨있는 서성의 부분,
서쪽 정확한 표현으로 탕춘대성의 서쪽에 있는 성
그리고 동쪽에 있는 부분들도 이 지맥을 따라서
지형이 자연능선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실질적으로 이
고리가 세 개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라고 하는 것들을
예치도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해 볼 수가 있겠다
앞서 도성연흉대
북한산성합도라고 하는 좌의
여지 이 지도에서 보셔도 이 세 개의 고리가 연결돼서
나란히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석성의 인공적으로 쌓은 성벽의
그 부분들은 서쪽에 상춘세성이 있지만
동쪽 부분들도
분명히 위호되는 공간들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은
옛 지도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이 지도도
도성 연용 북한 합포구에서 저벽지도
19세기 전반 지도 인데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이 세계의 연걸고를
세계의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워요
형태적으로도 분명히 이렇게 지금 등장을 하고 있구요
옛 지도 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근대지조 하고
좀 다릅니다 이 지도를 작성하는 사람이 관념
지도가 을 작성한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린 이란에
따라서 이 표현
방식이 좀 차이가 나는데 이 지도를 작성했던 사람들은
분명하게 이 지금
탕춘대성이라고 하는 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도 중에 하나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흉대도라고 하는 19세기 지도에서
이렇게 보시면
이렇게 제가 이것을 보는 것은
뒤에 가서 한 번 더 설명을 드릴까 하는데요
이렇게 보시면 이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게
이제 이동루트입니다
그래서 이 북쪽에서 이제 창의문으로 빠져나와 가지고
사실은 한복문을 지나 여기서 길이 갈라지죠
그 안쪽으로 해서 사실은 대남문 쪽
또는 대성문 쪽으로 이어지는 사실은
길들이 표현되어 있어요
실제 연결성곽으로
사실은 백성들이 전쟁 시, 위사 시
어떤 루트를 통해서
북한산성으로 이동했을까라고 하는 것들도
사실은 지도에
간접적으로 좀 표현되어 있다라고 하는
측면을 좀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뭐 이 도성도에서도 이제 북쪽에 있는 지금
이렇게 살짝 보이는 요 부분입니다
요 부분 요 부분이 이렇게 돼 있는 부분들이 어
탕춘대성이 서쪽 성과학을 얘기하는 거구요
요렇게 지금 지형이 능선
아까도 얘기하는 백악의 곡성 부터 구준봉
보현봉 그리고 문수봉 까지 이어지는 북한산성
그리고 좌우에 대남문과 대성문 사이에 보현봉이 있는데
그 능선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시면 아
이것들이 옛 지도를 작성하시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세계의 성곽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한양도성 이렇게 굉장히 입지적으로 보면
세계의 성들이 축성하는 방식
자연을 활용하는 방식 굉장히 유사해요
왜 그러냐면 지형이 능선을 활용하고
지형의 경사면에 면석을 쌓고
뒤쪽에 지형을 서로
그 면석과 이걸 일체화시키는 작업들을 했는데
이것은 탕춘대성, 한양도성,
북한성도 동일합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축성을 했다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해드립니다
그리고 굉장히 성곽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성문이라고 하는 것들,
또 치성과 곡성이라고 하는 것들,
다양한 성곽시설, 수문 이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까 얘기 드린 것처럼
탕춘대성도 한복문과 수문,
그리고 좌우이익화시설,
석성을 포함해서 석성으로 돼 있는 부분들
그리고 자연지형을 활용했던 안반 부분들
이런 부분들도 성벽의 영역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당연하게도 한양도성선 18
.6KM지만 그 안에는 자연
안반 사실 탐방해서 아시겠지만
인왕산의 치마바이
거기는 사실은 인공적으로 성벽을 쌓지 않았죠
그렇지만 포함돼 있기 때문에 북한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흉대성 그러니까
탕춘대성도 이런 부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다 포함해서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성곽시설 슬라이드도 보시고요
이렇게 보시면
저희 선조들은 굉장히 이 성곽을 쌓으면서
자연지형을 철저하게 이용했어요
그렇다 보니까 중국위성
아니면 유럽의 이 방형
또는 별모양의 성형성곽과 다르게 굉장히 꼬불꼬불해요
이게 자연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자연을 철저하게 활용하다 보니까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한양도성
탕춘대성 북한산성에 갖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다 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이제 한양도성의 낙산 부분이 있고요 이
장수마을 부분인데요
굉장히 이제 이 자연지형과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던 것들이 사실은 가보시면
물리적으로 확인이 되는 부분들이죠
그리고 이게 인왕산의 곡성 부분인데요
이것들이 거의 자연의 능선을 따라 존재를 하기 때문에
꾸불꾸불하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고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구준봉에서 찍은 사실은
한양동성의 안쪽 모습인데요
구준봉이라고 하는 봉우리는 굉장히 중요해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동성을 연결하는 곡성부터 동성까지 동성이라고
동쪽에 있는 동성은 지금 토축부민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그 부분들에서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이 구준봉에서 보시면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아주 전방이 굉장히 좁고 굉장히 가까워요
그래서 탐방을 해보시면 이것들이 한양도성,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사실은 정혜연 선생님께서는
조금 붙어있는 것들이 인식이 안 된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실제 가서 보시면
어느 지점에서 이것들을 보는 것에 따라서 다른데요
굉장히 가깝게 느껴져요
실제로 구준봉에서
이렇게 보면 이
성각들이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라고 할 때
굉장히 압축적으로 보이는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들이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들을
그런 감성을 그런 느낌들을 지울 수 없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고요
보수복원을 통해서
1970년대부터 굉장히 많은 보수복원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죠
사실은 지금은 보시면 일부 구간들은 훼손되어 있지만
그래도 땅 속에 묻혀있는 유적 구간들이 상당히 많아서
저희가 전체의 원형을 확인하는 데는
거의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1903년도에 찍은 사진인데요 이 목묘
남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이렇게 보시는 것처럼 곡성이 있고요
뒤에 인왕산의 치마바위가 보이는데
거기 인왕산의 치마바위부터
사실은 탕춘대성의 서쪽에 있는 성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어디로 이어지냐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홍지문을 지나서 다시 안문을 지나서 그 위에 향리봉,
향로봉을 지나서 승가봉, 문수봉
그렇게 이어지는 누트가 있거든요
그것들이 거의 잘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봉도 있죠
사실은 비봉은 진흥한 순수비가 있는
그 봉월이고요 이 능선을 따라서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 사진을 통해서도 보셔도
굉장히 이것들이 가깝게 느껴지고
하나의 일체에 대한 성각이다
이런 것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북한산상의 지금 상황인데요
이렇게 보시고 이 북한산상도 아까도
제가 앞서 보여주는 옛지도를 보시면 이 대남문과 대성문
굉장히 중요한 문입니다
첫 번째는 사실은
대성문 쪽으로 사는 이동의 누트가
이렇게 길이 잡혀 있다가
사실은 대성문이 나중에 지맥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대성문을 이용하지 않고
대남문 쪽으로 이것들을 좀 옮겨요 이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특이하게도
제가 슬라이드 보여주시겠지만 이 한양도성부터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줄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양도성의 북쪽을 따라서 응봉으로
따라서 이렇게 이어지면 사실은 형제봉을 따라서
이렇게 북한산성의 삼각산을 지나서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게 백두대관입니다
그런데 이 백두대관이라고 하는 지맥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여기에서 함부로 성곽을 인공적으로 쌓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지관들한테 물어보는데
아 여기를 어떻게 관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인공적으로 성벽을 쌓지 말고
사실은 흙을 쌓는 것은 괜찮겠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계속
흙과 돌로 관리를 하는
보토의 흔적들이 계속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측면에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사실은 3D 맵인데요
이것들을 이렇게 올려본 것인데
북한산성의 대동문하고
대남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거고요
이렇게 지형도 한번 지금
북한산상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오늘 제가 탕춘대성을 주로 설명드려야 하기 때문에
좀 빨리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행궁 부분 이게
이제 북한산상 안쪽에 있는 사실은 유적들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유적들이 온전한 모습을 갖고
지금 남아 있기 때문에
제가 오늘 참석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이 추천드리기에는 꼭
이제 시간을 내셔서
한번 이 지역을 좀 탐방해 보시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
그리고 이게 굉장히 가치가 뛰어난 유적이구나
하는 것들
그리고 충분히 세계유산적 가치가 있겠구나
더불어는 사적으로 지정되는 충분한 가치를 갖구나
이런 것들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탕춘대성
우리가 연흉대성이라고 불렸던 탕춘대성을 본격적으로
슬라이드를 통해서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작은 어디냐
한양도성이 인왕산 부분의 기차바이입니다
기차바위로부터 시작해서 홍지문 여기는 이제 한복문이라고
저도 이제 고쳐서 불렀으면 좋겠는데
이제 한복문을 거쳐서 향로봉 그리고 비봉 승가봉
문수봉 이 보현봉까지
그러면 이게
이제 여기서부터 는 이 구간부터는 북한산성입니다
이어지는 구간이고요
그 밑에 이렇게 지도를 보시면
지형이 이렇게 새카맣게 돼 있긴 하지만
이게 평지가 아니죠
평지 구릉지
산지를 활용하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단면으로 보시면
이것들이 분명하게 잘 나타나고
있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사진을 찍어서 보시면 실제 이런 모습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어디에서 찍었느냐
동쪽에 있는
형제봉에서 이 사진을 찍으시면 이 뷰가 그대로 나와요
그래서 이 동쪽에 아 저 동쪽에 있는 능선들
그리고 성각을 통해서 아
이게 충분히 이 부분을 관리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측면들 이렇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같이
슬라이더를 통해서 이동해 보시면
기차바이 능선
이렇게 기차바이는 사실 기차처럼 넓게 펴져 있죠
사실은 치마바이 넘어서 이렇게 돼 있는데
치형을 보셔도 이런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되고요
오히려 이제 치마바이에서 반대편을 이렇게 아니
저기 기차바이에서 반대편을 인왕산을 보시면
이런 모습이에요 저기에 보이시는 이 부분이 한양도성이죠
이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차바위 모습이고요
이렇게 타서 보시면요
여기서도 사실 사진은 좀 멀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기차바위만 딱 올라오셔도
북한산성이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가깝게 느껴져요
그리고 지형이 능선들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까도 반복적으로 말씀드리지만
굉장히 일체화된 성곽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겠다라고 하는 부분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들이 다 석성으로
인공적으로 다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구간은 토축해서 토성으로
자연 안반을 활용해서 이런 식으로
그리고 사실은 이게
동쪽 부분에 동성 부분도 마찬가지인데요
흙과 돌을 쌓고 식재를 해서 이것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성과기 기능들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측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근대 시설이에요
대한민국 육군이
사실은 여기에 초소를 쌓고 관리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냥 흥미로워서 갖고 왔습니다
사실은 지금 잔존 구간은 한 70M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까도 얘기하던 기록상으로는 60보
그러면 일보가 한 1
.2M니까 계산하면 한 60M
그래서 이것들이 치수들이 조금 다르긴 한데
실제로 다르면 한 70보,
70M 정도는 석성이 아주 잔존하고 있고
이것은 보건 구간입니다
그중에 또 일부는 구간은 복원한 부분들이 같이 있습니다
80M 그래서 70M 하고
80M 복원 구간을 합치면 150M니까
생각보다 길게 남아 있어요
그래서 기록에 의해서는 60보라고 하지만
이쪽 인왕산에서 홍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들이 상당문이 한 150M 이상 남아있다
그리고 뭐 연구를 통해서 보시면
더 남은 긴 구간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조금 문헌상
수치가 조금 다르다라고 하는 측면들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이 홍지문
한복문의 원래 모습들이에요
원형 모습들 1921년 홍수로 멸실됐다고 얘기하지만
정확하게는 언제 멸실됐는지 몰라요
1920년대 전후로 물론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4시 전에
모든 분들이 다 오신 거는 수업 시작하고 처음입니다
지각생 한 분 없이
그리고 시작
시간 전에 이렇게 모이신 게 정말 대단하시고요
우리 친구들도 학교 다녀왔죠?
네, 학교 갔다가 이 시간에 여기
박물관까지 나오기 쉬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선생님과 함께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저희가 밖에서 행사를 하고 있어요
하여튼 이런 모습을 갖고 있다
오늘 우리나라와
헝가리와 관련된 전시를 오픈을 하는 날이라서
그분들과 함께 저기서 행사를 하고 계시는데
저희가 오늘 살펴볼 전시실이라면
1976년에 이렇게 다시 보건공사가 시작되었죠
그래서 그 당시에 사실 당시에 16대 서울시장이죠
구자춘 시장이
이렇게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976년 8월에 이 모습인데요
이것을 해체하는 모습이에요 이 홍해
무사석까지 다 해체하는 모습이고요
그 해체한 다음에 다시 보건공사를 시작합니다
이게 완전히 이제 거의 하는 모습이고요
도로가 양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조성하면서
많이 복원하는 과정 속에서는 사실 본래 수문 쪽으로 4
.8M 정도 이동을 했고요
본래 지면에서 3M 정도 올라왔어요
인접한 도로가 그래서 그런 약점들도 갖고 있지만
사실은 충분하게 자료를 가지고
근거를 가지고 복원을 했다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77년에 완공된 모습인데요
이런 사진들
그리고 원형의 모습들
아주 사진들로 잘 남아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것들을 근거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모습하고 더블테이크라고 하는데요
같이 비교해서 보시면
이것들이 원형의 모습들과 어떻게 변경되었는가
아니면
원형의 모습들을 얼마나 충실히 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가지 사진들을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사실은 제가 발표를 드리면서
최근에 탕춘대성에 관한 관심들이 많아서
사실은 한양도성 박물관에서도 사실은 지금
탕춘대성은 전시하고 있기 때문에
같이 이런 것들을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진들
같이 이렇게 편하게 원형의 모습
그리고 현황의 모습들
그리고 옛 모습
70년대 사진
그리고 2020년에 2년의 사진들 같이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구간입니다
오간수문부터 향로본과 인공적으로 있는 부분인데요
이렇게 보시면 이렇게 능선의 모습들이 잘 보여요
일부 성각들이 수목에 가려서 안 보이기도 하지만
같이 근접해 보시면 부분들은 잘 보입니다
그래서 이 탐방을 하시게 지금은 조금 접근
노가 좀 어려우세요
그렇지만 이렇게 그 뒤쪽으로 돌아가서 고
이렇게 접근 하시면 충분히 가능 하시기 때문에
뭐 좀 원하기 노는
앞으로는 이렇게 탐방 노트가 잘 이 정비가 되면
더 많은 선생님들이
것들을 방문해서 볼 수가 있겠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지나가면서 계속 북쪽에 있는 향림봉
비봉 승가 봉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봉허들은 계속 인식이 됩니다
그 장면들이 앞쪽에 계속 있어서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확인하면서
저희가 탐방을 할 수가 있겠다라고 하는 부분이에요
여기 보시면 이게 성각 부분인데요
여장은 거의 다 지금 멸실됐어요
그리고 일부 남아 있긴 한데
최성 부분들은 아주 양호한 상태로
이렇게 잘 남아 있습니다
이것들을 앞서 보여드린 한양도성과
비교해 보시면 굉장히 유사한 방식
당연히 숙종 때
이후에 같이 축성을 했기 때문에 돌을 쓰는 거나
성과의 축성들이 굉장히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비교해서 보신다고 하면
이런 모습으로 구축되었구나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안문입니다 안문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올라가시면
이제 성과의 인공적으로 석성은 끝나요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제 봉 오리들만 남습니다
안밭 마치 인왕산의 치마바이 처럼
이제부터는 인공적으로 쌓지 않고
자연 안밭 그대로 활용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향로봉 까지 이어지면서 그 향로봉
역포로부터 비봉 승가 봉
문수봉 보현봉 까지
반복적으로 얘기하지만 이 능선을 활용한 것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옛 지도가 갖고 있는
그리고 오늘날의 현황하고 비교해 보시면 더 흥미로워
저희가 중요하다라고 하는 지점들
예지도에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지도가 갖고 있는 그 당대에
우리 선조들의 인식도 그랬던 거예요
그리고 당시에 그것들도 성광이 일부를 포함하고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들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항공사진이나 지형들을 보시면
이것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는 것들
이것들을 이제 지형들 이것들을 활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거의 뭐 이제 30분이 다 됐는데
아까 뭐 떠들어서 한 2,
3분만 동성 부분
보여드리면서 마무리 드리기도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 선재명과
공유하고 싶은 부분들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서쪽에 있는
탕춘대성의 서성이라고 불렀던
서쪽 부분만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도 4
.8KM에 하는 인공적인 부분
향로봉부터 비봉, 승가봉,
문수봉에 이어지는 이 자연
안반의 부분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다 성국의학의 일부 부격이에요
맞은편도 분명히 문헌 기록상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곡성 뒤로 구존봉, 산대봉,
형제봉 지나 4맥을 살펴보니
전일에 보축한 곳이고 라고 하는
그리고 뒤에 보시면 이것들을 끊임없이 보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들이
문헌을 통해서 계속 등장을 합니다
이게 1713년부터의 기록인데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봤을 때 이 동쪽에 있는 동성
구간도 분명히 탕춘대성의 일부로
저희가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앞서 보여준 지도처럼
그래야 이 세 개의 연결고리의 아주
독특한 수도의 방어체계
수도의 성과의 유형들이 완성이 된다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형으로 봐도 이거 인공적으로 올린 지형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아까 삼중고리
삼원고리 이런 형태들이 아주 잘 남아있죠
그리고 아까 반복적으로 얘기하지만
옛 지도에서도
그 중요한 지점들을
끊임없이 설명을 하고 있다 라고 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같이 확인해 보시면
이렇습니다 이 형제봉에서 북쪽을 보시면요
보현봉 대남문과
대성문 사이에 이 능선들이 그냥 연결되어 있는 거
당연히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모습들을 잘 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사실은 오히려 이제 맞은편에서
또 기차바위에서 찍어보시면
보현봉부터 이
백악산의 능성까지 연결돼 있는
그 동쪽의 부분들을 아주 잘 볼 수가 있습니다
보토현이라고 불렀던 그 부분하고
아까는 끝으로 이제 지메기 부분인데요
아까는 백주대강이 어디까지 한양도성에
이제 창덕궁이 있는 은봉까지
이어진 백주대강이 연결돼 있는
모습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요
사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들이 관리의 측면에서
그리고 이것들이 성곽에
방어 측면에서 함께
중첩되어서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맞은편이에요 아까 보였던 슬라이드를 보시면
거의 이렇게 자연
지형을 이용한 부분들은 굉장히 유사한 굉장히 이렇게
정점에 능선인 부분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형제봉에서 보시면
아까도 반복적으로 얘기하지만
굉장히 세계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굉장히 가깝게 느껴져요
그래서 이것들이 우리 선조들도 이렇기 때문에
공간을 인식하고
지형을 활용했구나
하는 것들을 물리적으로 잘 볼 수가 있습니다
평창 얘기인데요
사실은 이 안쪽에 평창이라고 하는 것들은 앞서 두 분
선생님들이 너무 잘 설명했기 때문에
사실 그 역할들,
사실은 또 연흉대성이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창고의 역할들
그리고 또 방어의 역할들
그리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연흉이라고 하는
역할들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는
공간이었다라고 하는 것들을
저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났는데
여기에서 발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수 선생님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탕춘대선
영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서성과 동성으로 둘러싸여진
위요된 공간이라는 걸 분명히 지적해주셨고
이것은 이따
동합토론 시간에
더 추가적인 질의응답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탕춘대성의 가치를 한반도 성곽축성의 전통을 계승했다
600년에 600년이 넘는 층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독창적인 도성방위체제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지적해주셨고요
다음 세대와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유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지정토론으로서는
북한산성 전문가인 경기문화재단의 박현욱
연구원님께서 숙고해 주시겠습니다
다음 발표는 탕춘대성 홍지문
오관수문의 암석학적 특징과 보존 상태에 대해서
국립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이찬희 교수님께서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공주대학교에서 문화재
보존과학을 하고 있는 이찬입니다
오늘 서울까지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준비한 내용은
오관수문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어떤 것으로 구성을 했고
또 현재의 보존 상태는 어느 정도고
그리고 앞으로의 탕춘대성을 보존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가면 좋겠다는
이런 제언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발표한 자료는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선, 현황 및 연구 방법,
암석학적 특징,
보존 상태, 보존 관리
체계 검토, 결원 순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이 탕춘대성, 또 탕충대, 연융대, 한북문
아주 많은 논의들이 있으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반복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강의를 들으면서 정말로 많은 공부가 돼서
앞으로 이 탕춘대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여기다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선 여기에서 좀 한번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인문학적인 배경 말고
우선 이 탕춘대성과 홍지문을 만들었었던
이런 석재들은 과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디에서 조달을 했고
또 어떤 보존적인 문제가 생겨서
최근에 보존 수리들이 진행이 됐는데
앞으로는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이걸 유지를 관리해야 될 것이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슬라이드를 한번 보시면요 이
홍지문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이렇게 겉보기에도
이렇게 붉게 생긴 부분이 있고
새로 수리하면서 넣었었던 신부재들일텐데
이렇게 허옇게 보이는 것들도 명암
차이가 있는 걸 볼 수 있죠
멀리서 봐서도 저기에는 같은 화감이지만
세 종류가 쓰였다는 것을
언뜻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밑에 이 오관수문을 자세히 쳐다보면
실제 여기에 있는 암석과는 또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고
또 보수한지
얼마 안 되는 이런
신석재들이 많이 사용됐다는 것을 금방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홍지문과 탕춘대성에 대해서는
암석학적으로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풍화정도는 어느 정도나 진행이 됐는지
그리고 저거를 만들 때는 어떤 치석 방법을 썼고
또 석재를 자를 때는 어떤 기술이 적용됐는지
그리고 저 석재를 어찌해서 가져왔는지에 대한
검토를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굉장히 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고
다만 이 오관수문에 대해서는 수리 과정을 거친 이후에
이런 2차적인 오염들이 생성이 돼서
자세하게 연구할 기회가 있었고
이번 저희 발표에서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 오관수문은 이렇게 시커멓게
변색이 돼서
아주 상당히 손상이 많이 된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저것은 암석 자체의 변질이라기보다는
표면에 노출된 이런 허연
물질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차의 배기가스나 이런 것들이 달라붙어서
이렇게 검게 변한
이런 모습들로 확인을 하실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자세히 보면
원래 있었던 암석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훼손을 입은 걸 보실 수 있죠
이러다 보니까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들이 진행이 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똑같은 현상들이 반복이 되게 되는데
이것은 77년도에 있었던 수리 과정에서
어떤 물질이 지 안에 들어왔길래
이런 물질들이 2차적으로 녹아나와서
이런 오염 현상들을 야기했는지
이것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 분석 자료에서도
그런 메카니즘들을 좀 입증을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메카니즘을 뒷받침할 만한
실제 자료들을 화직 확보를 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자료들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것을 헐고
새로 축조하는 방식보다는 유지하고 관리해 가면서
현상을 유지하는
이런 방법론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겠습니다
앞에서 보셨었던 전체적인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의 위치를 굉장히 거칠게
이런 항공지도에 표시하면
이런 모습으로 보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이 한양도성에 대해서
부분 길게는 한 200M,
짧게는 한 50M 구간을
12지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에도
두 지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암석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어떤 축성기법들이 쓰였고
석재 조달 체계는
어땠는지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탕춘대성에 대해서는
오로지 오관수문에 대한 데이터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이 탕춘대성에 대해서는
오관수문을 위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보셨던 이런 사진들이라서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좀 설명
드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충분히 다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밑에 보면 기록
뉴스 중에 일부
탕춘대성과 오관수문과
홍지문을 복원하면서 만들었던 자료들이 있는데
도성박물관에서 이 부분들을 같이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씀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77년도에 오관수문과 홍지문을 보수하면서
여기에 적용했었던 여러 가지 설계 도면들
그리고 제육의 이용 방법들에 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설계 도면이 있지만
실제 시공 과정에서 어떤 물질을 어떻게 썼고
배합을 어떻게 했는지
또 실제로 이 잡석을 채우고 이 잡석
사이사이에 결합재를 위해서 무엇을 썼는지
이런 것들이 지금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좀 살펴볼 때
많이 사용했었던 이런 그림들 중에 하나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오관수문은 일제강점기에 굉장히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77년도에 새로 보수를 하면서
원래 있었던 위치를 조금
달리하고 이 하상을 조금 조정을 하게 됐어요
옆에 보시는 붉은색 그림은 서울 시내 2020년도입니다
6월달에 굉장히 높았었던 기온과
여기에 늘었었던 강수량을 같이 비교를 한 것입니다
실제 이 오관수문이
최근에 어떤 홍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에
그야말로 100년에 한 번씩 올만한 이런
폭우가 진행이 된다면 이것의 통수 능력이 어느 정도일까
저는 조금 의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좀 관심을 가지고
정비 과정에서의
반영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연구한 내용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암석각적인 특성 손상도에 대한 평가,
보존처리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했고
또 맨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것이죠
국내의 성광문화예산을 대상으로
이런 디지털 기록화뿐만 아니라
유지 관리를 하기 위한 계측
그리고 수리의 예방보존
이런 측면에서 연구한 데이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비추어서
탕춘대성은 어떤 방법으로
보존 관리가 되면 좋겠다는
이런 제안점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서울
경기 북부 일대의 암석
분포도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암석 분포도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충대성을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이런 공가적 분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지질시대를 얘기하면
중생대 주라기인 셈이죠
이때 서울 일대를 관입했었던 화강암의 분포 지역입니다
이런 광역지질도에는
이런 화강암은 한 종류로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면
이를 이루고 있는 화강암은 여섯 종류나 됩니다
그리고 색깔과 조직은 또 다 다르죠
조선시대 한양도성과 중요한 문을 만들 때 썼던 암석은
그 여섯 개의 암석들을 나름대로 구분을 해서
동일 종류의 암석을 쓰고자
노력했던 흔적들이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탕춘대해성에 대해서는 이런 조사
자료들이 없어서
아까 말씀드렸었던 숙종대 또는 영조대 때
아마 건축이 됐었다고 한다면
현지에서 그 연간의 건축이 됐었던 것들은
한양도성에 쓰여있던 석재와 치석 또는 절석
그리고 축성
방법들은 나름대로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부분들은
차후 연구에서 좀 더 밝혀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커다랗게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이
화강암은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소위 서울화감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동쪽으로는 양주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의정부 너머까지
이렇게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고
이런 것들을 보통
암석학적으로의 저반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흔히들 복합암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 탕춘대성
성벽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도면화시켜서
이른바 맵핑이라는 작업을 통해
암석의 실체를 기록을 하지 못했지만 이 탕춘대성
성벽의 일부 구간만 보더라도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약간 붉은색을 띠는 것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어두운 색을 띠는 것이 있고
또 허옇지만
약간 회백색을 띠는 암석들이 있는 것이 한 자리에
이렇게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죠 이 부분은 적어도
세 종류의 암석이 혼용이 됐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전혀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지도를 통해서 이것을 밝힌 적이 없어서
조금은 아쉬운 상태에서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홍지문 구간도 자세히 보시면
이렇게 붉게 만들어져 있는 건
이건 아마 원래 있었던 부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사용했던 부재도 저희들
조사 결과에 의하면 두 종류가 이렇게 혼재가 돼 있는데
수리하면서 썼었던 것들은 색이 좀 다른 것이 있고
지금 밑에서 보시는 약간 붉은색을 가지고 있고
검은색 반점이 있는 이런 화강암들입니다
이런 화강암들을 흔히들
장석이 붉은색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홍장석화감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이 홍지문의 주석재로 쓰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간소문에는 이 암석보다는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허연색
그리고 검은색 반점을 가지고 있는 이름하여
흑운모 화감이라는 것이 주석제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오관소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런 석재들을 이어붙인 이 사이에는
이렇게 하얗게
백화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겠고
그리고 이런 암석 중에서
출처를 밝혀줄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이
암석 속에는 이렇게 포함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시커먼 색의
또 다른 포획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을 분석을 해서 유출을 쭉 하고
추적을 하게 되면 저 암석들의 산지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곤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시는 것처럼
이것들은 원석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 위에 있는 이런
암석과 색이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런 암석들을 전부 다 다 이렇게 맞대어서
결굴한 사이에서는 어디를 막론하고
전부 다 하얀색 침전물들이 새어나와서 어디는 고드름처럼,
종유석처럼, 어디는 피각상으로
뒤덮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원인과 제공
물질은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오관수문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쳐다본 암석의 분포 지도들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암석의 종류를 세 종류로
이렇게 표시를 했고요
저희들이 조사한 오관수문의 암석은 818개입니다
물론 전체 석재는 훨씬 더 많을 텐데
당시 조사 가능한 것은
800개가 조금 넘는 이런 석재에 대해서 조사를 했고
참고로 한양도성에서
아까 12개 구간 정도를 말씀드렸는데
이런 암석을 지도화시켜서 자세히 세분한 것은 1만 개가
좀 넘는 굉장히 많은 양의 조사 데이터들이 있고
이를 근거로 이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을 하고
또 문헌상에 기록이 돼 있고
그동안 보고하신 자료들이 있습니다
왕조실록을 포함한 승정원
일기에 나와 있는 기사들 중에
어느 왕조에 어디에서 석재를 생산을 했고
석산이 어디에 있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저희들이 찾은 것이 한 200군데 정도 됩니다
그중에서 지금까지 채석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한 40여 군데가 되는데
물론 여기에 썼었던 이 세 종류의 암석은
서울화강암을 이루는 암석의 주 암종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오관수문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원래 암석은 아마 이랬던 약간
붉은 이런 암석이었을 텐데
현재 오관수문은 이런 허연색을 띄고 있는 흑은
무화과암이 주 암종으로 약 65
% 정도를 차지하는 걸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암석을 세분하기 위해서
과학적으로 굉장히 많은 분석
방법들을 거치게 됩니다 이 중에 하나가
암석이 가지고 있는 미세
자기적인 특징을 가지고 이런 산지도 해석을 하고
암석의 특성을 해석을 하곤 합니다
지금까지 들으셨던 인문학적 내용하고는
전혀 다른 이런 공학적인
그리고 화학적인 베이스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석지의 동질성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현미경으로 자세하게 관찰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웬만한 병원에 가면
전부 다 비파괴적인 방법으로 진단을 합니다만
실제 병적 징후가
너무한 것들은
조직검사를 통해서 확진을 해야 되는 것처럼
암석도 맞춰 가지고
모든 물질 자료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검사를 통해서
어떤 정도의 변화 과정을 거쳤고
이름하여 화학적인 진화
과정을 거치던지를 판별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인데
자 그럼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앞에 전체적인 그림이 지금 빠져있는 채로
그냥 넘어왔습니다 이
오관수문에 대해서 이런 변색이 발생하게 된 원인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이것은 2007년도와
2008년도 사이에 진행됐었던 자료들이고
2017년과
2018년도에도
다시 한번 이런 일들이 진행이 됐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각각의 석재 사이에는 하얀색 이런 침절물들이 있고
앞에서 보시듯이
이런 하얀색
침전물 위에는 이렇게 검은색
침전물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하얀색 침전물들을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한쪽 거풀을 벗기게 되면
그 안에는 이런 황갈색의 토양 침전물들이죠
이게 같이 중첩이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물이 떨어지는 부분은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석회 동굴에서 만들어지는 커튼
또는 종류수석 형태의 침전물들이 있는 걸 볼 수 있고
또 한 여름철에 여기서 살던 생물들은 죽으면서
이런 석회침조물들과 함께
이렇게 매트를 형성하는 현상들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관수문의 양쪽 측면에서
인면도에 표시한 그림입니다
물론 이건 평면도도 있고
아치 형태의 바닥 그림도 있습니다만
인면도에 표시를 해서 가시적으로 나타난
전체적인 변색 요인을 이렇게 스케치를 하고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현재 보시는 것처럼
이런 현상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검게 표시되어 있는 분과
하얗게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을 전체적인 토털 커버리지
흔히 얘기하는 표면을 덮고 있는 퍼센트로
환산을 하게 되면 거의 한 48
% 흔히
얘기하는 오관수문에 대해서는 어느 쪽에서 보나
거의 반 이상이 늘 이렇게 오염물로
피복된 상태였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 그리고 이런 것들 중에 일부 일부를 조금
수거를 해서 조직과 성분
이들을 분석을 하게 되면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것은 동굴 석회 동굴에서 만들어지는 생성물
흔히 얘기하는 종유석과 똑같은 성분을 가지고 있고
주성분은 CaCO3
흔히 얘기하는 시멘트가 물에 녹아서
2차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생석회 성분과 똑같다
뭐 이렇다는 것은
보수 과정에서 시멘트 물질을 썼다는 것이지요
70년대에 우리나라 석주문화재를 보수하면서
어디나 실제는 다 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만 특별한 경우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러다 보니까
지금까지 이런 부작용이 나타난 사례는
오건송문의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흔히 얘기하는
X선을 통해서 이 물질을 정밀하게 동정을 할 때
썼던 것들이고
맨 밑에 보이는 이 그림은
앞에서 말씀드렸었던 황갈색을 띄는 물질들의 원인이 뭐냐
쉽게 말씀드리자면 비산 토양 먼지 들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이 같이 포함이 돼서 두꺼운 매트
층의 여 맨
밑바닥을 형성해서 뜬 것으로 설명을 할 수 있겠고
자 이것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이렇게 살펴보면
은 흔히 얘기하는 이런 2차 생성물
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조직
그리고 결정의 형태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고
어이 성분들이 뭐냐를 알아보기 위해서
밑에 보시는 그림처럼 칼슘과 인
그리고 철의 성분들을 이렇게 쭉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맨 바깥쪽에
이렇게 시커멓게 크러스트를 형성했었던 이런 물질들은
탄소가 검출되는 이런 성질들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담당 관청에서
이것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세척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안들이 제시가 됐었고
저희들이 세척을 하기 전에 기본 데이터를 만들었고
이런 보전 처리 자격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서
이런 처리 과정들을 진행을 했습니다
피각이 얼마나 두껍게 형성이 됐든지
이런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면 이걸 제거가 할 수 없었을 텐데
물론 여기는 일반적으로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런 석주문화재를 흔히 얘기하는 클리닝을 할 때
세척을 할 때 쓰는 도구들이 그대로 사용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피각증을 벗기고 나니까
여기에는 이렇게 붉은색 페인트로
낙서 같은 것들이 좀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흔히 얘기하는 케미칼
리무버라고 부르는 이런 세척제인 셈이죠
이걸 이용해서 이렇게 세척을 해가면서
이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높은 산도를 갖습니다
그래서 이걸 중화시키면서 적용을 해야 되기 때문에
현지에서 이런 pH
조절을 할 수 있는 이런 시험
도구를 같이 사용하면서
전문 처리 회사에서 같이 진행을 했었던 사례들입니다
이것을 먼저 보시면
여기도 지금 그림 하나가 생략이 돼 있는데
보존처리 전과 이후에 이렇게
이제 그 성능이 나름대로 많이 개선됐다
이름하여 클리닝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좀 설명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 제공 물질에 대해서 어디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한 조사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기 환경이 바뀌게 되고
또 강수가 오게 되면
정말로 그 안에 있는 물질들이 다 새어나오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매뉴얼화해서
일상적인 관리체계를 갖는 것이 좀 필요하다
이런 논의 과정들을 거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2017년도에도 똑같은 처리
과정들이 진행이 됐는데 이 당시에는 제가 직접 연구에
조사에 참여를 하지 못해서
그 이후에 데이터는 획득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아마도 2007년과 2008년도에 있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과정들이 진행이 됐고 이 보고서를 통해서
같은 방법론이 적용됐다는 것을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 정밀 진단과
수리 방안을 검토하는 이유들이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위에서 보시는 것은
한양 도성에서 나타났었던 이 풍화 현상들입니다
맨 앞에서 보시는 것은 이런 균열이 있고
꼭 대기가 벗겨지고 떨어지고
그리고 그 손으로 누르면 숙숙
팽길 정도로
암석이 포화 된 것이 바로 두번째 경우입니다
흔히 흔히 말하는 입상 분해 고 탈락
이런 경우를 이제 발생이 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어디나 자연스럽게
이런 그 생물들이 이제 피복을 하게 되고
과거 이런 그 예 그 얘기하는 이제 이 배기가스
그리고 이제 서울의 도심화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공해 유발 물질들이 결국은 성돌에
이렇게 시커멓게 피복을 하게 되는데
물론 이것을 완벽하게 다 제거를 해야 되느냐
이건 논란의 소지가 당연히 있지요
그리고 또 이걸 관리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범도 물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상태가 밑에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까지 진행이 됐는지를 아는 것이
이것을 좀 더 억제하고
앞으로 이것을 보존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데
굉장히 필요하다
이것이 이제 한양도성을 연구하면서 얻었던 자료입니다
이것을 홍지문
그리고 이 탕춘대성에
같은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런 연구 체계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또 하나 이 오른쪽에서 보시는 이 그림은 숭례문
6축입니다
숭례문 6축에 남쪽이고 북쪽 그림인데
양쪽을 합하면
석재의 개수 외면
부자의 개수가 600개가 좀 넘는 것들을 저런 방법으로
암석의 종류를 전부 세분했습니다
언뜻 보실 때
네 종류의 암석이 사용이 된 셈인데 이 중에서
녹색으로 표시한 이 부분들이 한국전쟁 때
손상을 입어서 62년도에 다시 수리를 하면서
끼워 넣었던 신석재들입니다
이런 신석재들의 산출지가 어디였고
이걸 어떤 방법으로 저달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 보고가 돼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일간지에도 기사로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양주의 암석입니다
그렇지만 원래 숭림은 육축을 구성했었던 양쪽의 석재들은
거의 대부분 남산에 있는 석재들을 사용했고
남산에 있는 석재와 동질성
분석을 통해서 완전히 입증됐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조사를 하면서 다녀서
현재 서울 시내에 노출됐던 이 암석들의 조성
그리고 색들을 분석한 내용들이 바로 이거인데
어디를 가든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이런 채석 흔적들이 질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런 채석 흔적이 한양도성을 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숭례문을 축조하기 위해서 띠었던 채석 흔적이다
단언해서 말씀드리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렇지만 저런 채석
흔적들이 어느라
비슷한 규모와 기하학적인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은
저걸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저기에서 석재를 공급받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이들을 같이
해석을 하면
충분히 석재의 산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내용으로
설명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 보셨던 서울 지역의 지도 위에다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준대성을 표시를 하고
이렇게 손에 망치를 들고 있는 것처럼
표시한 이런 부분들이 서울 시내 근처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현저하게
우리가 지금
가서도 볼 수 있는 채석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물론 이것을 아까 말씀드렸듯이
200여 군데를 조사를 하면서
그야말로 현저하게 남아있는 것은 밑에 있는 것처럼
40개 이상의 채석 흔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이것은 남산, 인왕산,
북한산, 계운산, 오폐산
그리고 낙산 백악산 여기에도 질비악이 늘어서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한양도성을 따라서
개방이 되지 않은 민가의 뒤탐
그리고 거기에 노출된 바위에도
이런 흔적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양도성이 원형을 유지하려고 굉장히 많은 애를 썼고
지금까지 보존관리가 잘 돼 있지만
이런 유실된 구간들이 꽤 많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세계유산이 가져야 될 가장 큰 덕목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이제 완전성일 텐데
이런 완전성들이 약간의 상처를 입었단다면
이런 재료를 구하고
이런 연구 과정을 통해서
그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완할 수 있는 이런 시스템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대량 채석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이런 개발 과정을 통해서 흔적을 없앨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들도 같이 이렇게 보호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뜻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었던
이런 흔적들과 함께 이 일대에 분포하는 암석들
그리고 조성들
그리고 한양도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각각의 산지별로 해석한 자료들이
이미 DBS로 구축이 돼 있고
국내외 학술지에
이런 논문들이 많이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것들이
탕춘대성에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한양도성에서 보시는 것처럼
각 구간에 대한
디지털 기록들이 만들어졌고 이 기록을 대상으로
저희들은 아주 자세한 도면화
과정들을 거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컨텐츠를 활용하는 것은
극히 일부입니다만 이 아래에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스캐닝 자료를 가지고
영상 분석을 통해서 밑에
이렇게 붉게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파란색에 표시되어 있는 부분에 비해서
배부름 현상이 현저한, 이른바 편차가 4,
5CM 이상 나는 부분들입니다
자 이런 그 디지털 기록화를 통해서
탕춘대성에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앞으로 독의 위험이 있단다면은
예반보존 차원에서 이런 연구들이 같이 진행이 되고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와있는 이것은
그 뒤에도 하나가 이 그림들이 좀 있는데
공주에 있는 공산성의 경우는
전체적인 관제 시스템들이 만들어져 있어서 어 우기
그리고 해빙기에
성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데이터들이 확보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벌써 8년째 데이터들이 만들어졌고
그 데이터를 기준으로
8군데의 수리보건이 시행된 바가 있습니다
탕춘대성에 대해서 꼭 이렇게 해야 될 필요는 없지만
관심을 가지고
이런 원스톱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이런 디지털 시스템들이 만들어지길 기대합니다 이 결론은
이렇게 몇 가지로
정리를 했는데 이 부분은 자세하게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앞에서 이 설명 드린 것처럼
아직 이 탕춘대성 에 대해서는 석재
그리고 산지 어 그 다음에 축성 치석 또 절서
그리고 앞으로의 예방보존을 위한 관리 시스템
이런 것들이 조금 아쉬운 상태라고 이렇게 판단을 했고
뭐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이런 부분들도 같이 관심을 갖고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다 하는 뜻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차는 계승 님 고생하셨습니다
아 탕춘대성의 암석학적인
특징과 과제에 대해서 잘 짚어주셨는데요
1977년도에 수리
과정에 투입된 재료들로 인해서 오염이 발생했고
이것이 기타 무기물질들과 결합해서
여러 가지 오염과 손상을 일으켰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덧붙여서 세계유산의 완전성 보완을 위해서
재료적 진정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짚어주셨고
향후에 탕춘대성 보존 관리를 위해서
특히 탕춘대성 석재
보존 관리를 위해서 어떠한 사업들을 진행해야 될지
정리를 잘 해주셨습니다
이찬희 교수님 발표에 대해서는 지정
토론 시간에 영지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김사덕 교수님께서 토론을 해주시겠습니다
지금 저 시계로 16시 40분인데요
약 20분간 휴식을 갖고 5시, 17시
정각부터 한국교통대학교 백종원 교수님을 좌장으로 모시고
종합토론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를 들어주신 청중 여러분 감사드리고
저는 여기서 물러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종합토론 좌장을 맡은 한국교통대학교의 백종원입니다
박수 지금부터 탕춘대성
사적 성격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종합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토론 시간이 1시간입니다
그리고 행정 업무상 18시 전에는 끝나야 된다고
주최 측에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 주제와 맞게
탕춘대석의 사적 지정을 위한
그러한 역사적 가치가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사적
지정 이후 세계유산 등재까지도
이렇게 추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향성 설정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역시 시간
엄수하는 것이 역시 저의 임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제한된 시간 내에
그 네 개 주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은
좀 응축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로는 종합
토론 방식을 그 약정
토론자들께서 먼저 질의 응답하시는 시간을 갖고요
이후 자유 토론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그 자유
토론에서는 현재
탕춘대성의 구조와
현황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최
측의 현장 발구 조사를 담당하시는 조치욱 선생님께
현재까지의 고과학적 현황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또 따로 의견을 좀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 발표된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과연 사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한양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을 이어는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어떤 것을 가지고
그 특징을 부각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발표 전반에 대해서 들은 소감은 역시
그 첫 번째
정혜연 선생님이 발표하신 부분에 대해서
산성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새로운 시각이다 라고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김영수
선생님의 인문학적 환경을 말씀하시면서 동쪽성과 서쪽성,
서쪽성은 자연
능선을 활용한 보토 개념
이라고 하는 부분이 또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그 성곽을 이야기할 때 인공적인 성벽이 있고요
또 자연적인 성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같은 경우는
자연적인 성벽을 초벽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개념들이 바로 새로운 시각화에서
현재 탕춘대성에 적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저는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안에서 OUV를 갖다가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 그리고 그
현재 명칭 문제가 상당히 많이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
근데 이러한 명칭을
우리가 현재대로 홍지문 및 탕춘대성으로 해야 될지
아니면 한북문
아니면 연흉서성 등의 명칭으로 해야 될지도
오늘 어느 정도 거기에 대한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표해 주신
이찬희 교수님께서는 그간 한양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석재에 대한
전반적인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유적의 가장 완결성을 뜻하는 진정성,
완정성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암질 분석
특성과 손상도
훼손에 대해서 아주 세밀한 내용까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역시 탕충대성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발표자들께서는
전반부에 발표를 통해서 다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토론자 선생님들을 먼저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주제의 이왕문 선생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의 동의도 없이 발표 마치고 토론 끝나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가는
나중에 혹독하게 치르실 겁니다
두 번째 기호철
소장님에 대한 약정토론은 한국국방안보포럼의 김병륜
선임연구원이십니다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주제에 대해서는 경기문화재단의 박수입니다
현욱 선임연구원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주제인 이찬희 교수님의 암석학적 특성과
보존 현황에 대해서는 명지대학교
보존관리학과의 김사덕 교수님께서 토론해주시겠습니다
자 그러면 그 첫 번째 주제
는 이학문 선생님이 먼저 토론을 하고 가셨기 때문에
주제 2
탕춘대성 과 홍지문
명칭에 대한 고찰에 대해서
김병윤 선임연구위원께서 먼저 토론해 주시겠습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김병윤입니다
선생님께서 잘 정리해 주셔서 발표 를 하셨기 때문에
저도 대부분의 발표 내용에 공감을 하고요
다만 토론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가벼운 질문과 좀
부연적인 성격의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발표자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지만
연륭대성이나
연륭성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현재까지는 찾아지지 않습니다
지도에서도 없고
문헌 기록에서도 지금 찾아지지 않고요
주로 보이는 성 이름을 명시한 경우에는
연융서성이라고 표기를 하거나
연융대서성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있는데
지도에서 표기된 사례는
연융서성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더 많고요
물원기록에서도
연융서성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면 실제로는 기록상에 연융대성이 보이지 않고
연융서성만 주로 보이는 상황에서
사정면칭을 연융대성이라고 한다면 이게 이제 가능하려는지
그리고 이제 어떤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지 않는 명칭으로 변경하는 게
과연 논의 과정에서 가능할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직은 조금은 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영윤등석이 영윤대성이 더 적합한 명칭이라고
판단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발표자분의 보충 설명을 듣고 싶고요
두 번째는 일본의 연장선상인데
저희가 이제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약간 고민해야 될 대목이 탕춘대 라는 어떤 원래 지명
전표적 그 현재 그 월드캐슬 빌라 있는 그 지점입니다
바로 그 지점인데
그 앞에 이제 원래 그 연중대 라고 적혀있는 그 바위
석각도 있었구요
60년대 파괴되기 전까지 석각도 있었던 그 지점인데
그 지점에서 탕춘대라는 지명이 처음 출현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까지 넓은 지역을 다 탕춘대라고 부릅니다
건너편에서 건너편에 있는 그 도로
건너편에 있는 그
총룡청 부지는 원래는 탕춘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도 다 조선 후기가 되면 탕춘대라고 부르고
연흉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 해당하는 지명으로서의
좁은 면적에 해당하는 지명으로서의 탕춘대와 연흉대
그리고 보다 넓은 지역에 해당하는 지명
이게 지금 복합되어 있다는 점도 고려를 해야 되고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건 이 지명을 따지자는 게 아니고
성곽 이름을 따지자는 건데
그러니까 그 지명에서 부과된 2차적인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설명을 이렇게 달아놨지만
실제 기록 용례를 보면
가장 풍부한 그 양적 기록으로
빈도수로 따지면 많은 건 탕춘성이에요
오히려 훨씬 압도적으로 제일 많은 건 탕춘성입니다
그리고 연룡이라고 붙은 지명 중에
가장 양적으로 많은 것은 연룡서성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떤 측면에서
어떤 우리가 지명에 기반한 명칭이 아니고
지명에서 2차적으로 생성된 명칭인데
그러면 정확한 당시
공식 명칭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융서성이나
상춘성이라고 적혀있는 문헌도 다
국가급에서 작성된 연대기록들이고요
군영에서 작성한 기록이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통 이제 숙례문 이야기를 하는데
숙례문이 정식명칭이고
남대문이 이제 그 어떤 통황적인 명칭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신록에서, 승정원일교에서 비교해 보면 숭례문이 1500건,
남대문은 200건으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같은 방식으로 비교를 해보면 훨씬 많은 건 탕춘성과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탕융소성이라는 거죠
그럼 이렇게 본다면 과연 탕춘대성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성
이런 명칭을 우리가 지금 정식 명칭이라고 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지금 남는다는 거죠
그래서 이 부분이 지금 해결이 돼야 될 것 같고요
세 번째 질문은 이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명칭 부여지침에 명칭을 바꿀 때
어떤 규정이 이렇게 있는데
가급적 현행을 유지하되
현재의 통증과 상이하여
혼란이 예상되는 경우에 하나여 명칭을 변경한다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여기에 지금 규정이 계속 바뀌고 있는데
제가 관계자한테 물어보니까
서울시에서도
문화재청이 규정을 대체로 준용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렇게 규정을 준용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명칭을 변경할 때
어떤 방면에서
주로 포인트에서 접근을 해야 명칭 변경이 용이할 것인지
그런 부분에서 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한북문의 명칭이 더 적합하다는 데서는
전적으로 공감을 하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는데
다만 한북문의 최초 축성 시점에 대해서
연대를 지금 상당히 소급시켜서
지금 오늘 새로운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현재로서는 한 기록밖에
안 나옵니다
하나의 기록에서만 그 기록이 보이고
그것도 지금 사실은 보면 해당 책의 본문이 아니에요
두 주입니다
두 주에 아주 세 필로 이렇게 적혀있는 기록이기 때문에
과연 그 기록만으로 이렇게 연대를 지금
아주 거의 100년 이상 지금 당기는 결과가 나오는데
좀 더 다른 문헌사로에서 좀 찾아서
확인이 필요하지 않나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자면
저도 객관적으로 봐서는 연융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성과
기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 연중 소송이 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부분에서 발표자 의 의견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1
소장님 뭐 중간에 제가 정리 안 해 드려도 연용 대성
그 다음에 그 근거
그 다음에 이제 한복 문
이렇게 그 답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어 많은 지적을 해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함께 좀 고민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이게 용래를 봤을 때
연용서성 이라고 하는 용래들이 좀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연용대성이나 연용성으로 표기한 사례는 없는데
대안으로 연용대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
지적이십니다
아까 저도 발표를 했었고,
다른 선생님께서도 동쪽 부분에 토성구간을 말씀하셨는데
연흉대 서성,
연흉서성은 지금
현재 한북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그쪽
성과 극만을 읽었기 때문에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하실 때
한 가지를 제가 설명해서는 했었는데
가장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법전입니다
법전인데 법전들에는 전부 북한산성
남한산성 그리고 연흉대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연흉대 성자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설명을 여쭈었을 때
연흉대성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연흉대 자체는 크게는 세 가지 기능을 하게 되는데
첫째는 거기에 있는
창고의 곡식들을 지키기 위한
관리하기 위한 기능이 첫째고
두 번째는 북한산성이 한양도성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곳을 관리하는 북한산성
관성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지휘소 자체가 총영청이 되면서
연흉대가 북한산성과 탕춘대성과
그리고 도성을 방어할 때
시스템들이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소라고 하는 개념을
더 강하게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능은 오늘
토론 에서 발표회에는 안 나왔는데
총 용청이 거기에 들어서면서
경기감사 를 총용사가 겸임하게 되면서 실제로 총용청이
그러니까 탕춘대성일 때가 경기감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도 대단히 큽니다
그래서 도성을 외곽까지 방어하는데
결국은 총영청,
그리고 총영청이 그 기능을 하면서
탕춘대성은 경기까지
아우르는 지휘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연흉대성이라고 표시된 것은 없고
단지 연흉서성이라고 하는 표현은 있습니다
근데 아까 제가 발표를 했을 때
탕춘서성 방향 외성 하는 것
특히 서성이라고 하는 명칭은
탕춘대성을 이룰 수가 없다라고 하는 말씀을 드릴 때
화자의 관점의 중심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거기에 연흉이든
탕춘이든 조지석은
그 위치의 중심
위치를 알 수 있는 방향 표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흉서성이라고 하는 것은
연흉대의 서쪽성이라고 하는 뜻이지
그 자체가 고유명사로 삼아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춘대성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는 없는데
그렇다면 아니요
연흉대성이라고 하는 표현은 없지만
연흉대라고만 표현하게 되면
연흉대는 총영청을 이르는 말 이 되기 때문에 성과까지
아울로 표현하기에는 좀 버거운 측면이 있어서
연흉대 플러스
성으로 표기 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하는 것이
제 제안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용례를 가지고 검토해 주셨고
그 다음에 마찬가지 로 연흉대 서성이 문제인데
아까 1번 설명과 거의 연계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연흉대 성이라고 하는 표현은 기록상에는 없다
그리고 연흉서성이라고 하는 표현은 있다
하지만 그 자체는
연흉서성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쓰인 게 아니고
연흉대지이 서성일의 의미를 추격한 것이지
그 자체가 고유명사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여기에 대해서는 저는 이 대안을 제시할 때
크게 두 가지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사적을 지정한다
그리고 사적 지정
이후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과 탕충대성을 하나로 묶어서
표제는 어떻게 삼아야 될지는 모르지만
조선의 수도방어 시스템,
뭐로 하든 어쩌든
그 의미로 하나로 묶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측면에서
그 세계를 아울러서
보여줄 수 있는 이름으로 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옳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것이고
그 사례들을 가지고 분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특히 사적에서 선과학들의 사적
명칭들은 예전에 제가 제시 하지 않았던 형태로
지정 명칭이 되었던 것들은 최근에 지명
플러스 누순산성
하는 식의 형태로
다 이름이 개정이 되어서 고쳐져서 고시되었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을 살 펴봤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 었고
네 번째 한북문의 문제인데
현재 지금 총형 사례를 말고는
그 보다 더 시기가 앞선 시기에
내용 들에 대해서는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조선시대
그 인조 이전 자료 가운데 한북문 으로
인조가 이름을 고치기 전에 문이 있었으면
그때도 이름이 있었 는가 해서
지금 열심히 검색은 하고 있고 한데
아직은 이렇다 할 만한 자료는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계속 보고 있는 건
DB로 추출되어 있지 않지만
열성어제들을 전부 다 검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성어제에
역대 임금들이 쓴
어제문들이 실려 있는 것들을 보고 있는데
이제 그곳에 간혹가다 실록이라든지
승정원 일기에 없는 임금님들의 직접 쓴 것들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떤 문 에 대해서 쓴 것을 전부
크로스체크 하고 있는데
아직은 구체적으로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 찾아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만족스러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로 추가하실 내용이 있다
후반부에 다시 하시죠
네 저는 짧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니요
굉장히 길게 말씀해 주셔서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다 보니까요
다시 약정 토론이 지난 다음에
다시 한번 명칭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문헌과 시각자료로 보는 탕춘대성
일대의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박현욱 선임연구원께서 토론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경기문화재단의 박현욱이라고 합니다
저는 주제 3번
문헌 및 시각자료를 통해 본 탕춘대성
일대의 학생과 같이 하는 주제로
서울시립대학교 김영수
교수님 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습니다
먼저 탕춘대성에 대해
새롭게 자료 정리와 의미 있는 발표해주신
김영수 교수님께 감사드리고요
그리고 지금이라도 탕춘대성에 대해
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
국가사적으로
탕춘대성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 및 사적
지정에 대한 서울투표실 노력에 대해
지지와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바입니다
토론자로서 발표문에 주요 내용과 의의를 정리해 본다면
이번 발표문에
가장 큰 내용은 탕춘대성 의 동성과 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기존의 탕춘대성이 일자성 내지는 서쪽
성병 만을 다루는 시각에서 탈피해서 어 한양도성
그리고 북한은과 동일한 형태의 또 하나의 성과
그를 규정하고
조선 후기 도성을 방어하는 도성
방어 시스템의 삼중고리
형태의 세계의 성곽을
인식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1760년대의 해동지도의 경도,
19세기 좌회여지의 도성연용대 북한완성 합도,
그 다음 동국여도,
그 다음에 접역지도 등
옛 지도에서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근거를
충분히 제시한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북한산성 부존관리를
2011년부터 일부 담당해왔었는데요
그 발굴 조사의 경험을 비춰보면
역시나 탕춘대성의 가치는 도성의 배후산성으로서
북한산성과 그 연계성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탕춘대성의 축성과정과 중단,
재축성 등 부침의 과정만큼이나
복잡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러한 그 복잡한 축성 과정이 탕춘대
성의 가치를
단순히 보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도성방어를 위한 전 국가적 영향들이 총동원된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논의 결과물
인과 동시에
상춘 대성에도
군사적 역할을 부여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음 관련하여서
제가 발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어 성곽은 무엇인가 로부터 보호
화해 해야 되는 것이
그 1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탕춘대성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여야 될 것이
어떤 것인지 질문을 드리고요
두 번째로는 탕춘대성의 성광라인이 자연성벽
구간을 포함해서
도성의 인왕산 구간과 북악의 곡선 구간까지를 포함하고
북한산성에서는 문수봉에서
보현봉 구간까지를 두 개의 성곽의 외벽
라인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곽의 외벽
라인을 공유한 성곽의 예가
혹시 국내외적으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 번째로는 발표자가 발표하신 서울시와 경기도
고양시가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통합하여 연속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 중에 있으며
세계유산이란 개별 국가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소중하고
대체 불가능한 자산으로서 주권,
소유권, 세대 등 시간과 공권을 초월하여
전 세계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세계유산의 등재만큼이나
유산의 보호관리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상춘대성의 보호 관리를 위해 가장 강조되고
시급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춘대성의 전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느끼기 위한 삼각길이
아직 전체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접근이 일부 불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답사미 접근이 제한된 곳들이 있는데요
한꺼번에 금방 되진 않겠지만
성곽길 정비의 계획이 있는지 조금 궁금하고
차후에 전체적인 성벽을 직접 걸을 수 있는 성곽
답사길이 열려지기를 설명하면서
토론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예 식자의 답변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씀드릴께요 4
뭐 토론 감사합니다
박현우 선생님은 뭐 잘 지적해 주셨구요
뭐 큰 문제라기 보다는
이제 박희성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사항들
그런 것들을 좀 더 확인하는 질문이었다고 생각을 하고요
일단 저희가 지금 탕춘대성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들이 세기우산으로 등재하는데
탕춘대성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들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요
답변에 앞서서 저희가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좀 형태적으로
공간적으로 좀 통합된 유기체 하나의 덩어리로
방어체계 도성의 방어체계로 인식할 때는
형태적인 접근들을
그리고 물리적으로
어떻게 시각적으로 이것들이 연결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특히나 연흉대성의 지금
서쪽에 있는 서성 부분과 굳이 얘기하자면
동성이라는 표현은 안 돼 있지만
동쪽에 있는 동성 부분들을 할 필요가 있고요
그렇다라고 하면
이것들이 이제 기업 전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대로 통합해서
이제 연흉대성 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제 근거들이 조금 저는 거기에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제 이제
석외에 좀 그런 느낌들을 말씀드린 거구요
질문 3가지의 간단하게 좀 발표를 드리자면
첫 번째 질문에서는 탕춘대성 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호할 대상이 무엇일까
이것은 정혜연 선생님
말씀해 주신
대로 상춘대성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죽어도 일부 있지만
사실은 군사를 훈련시키는
연흉이라고 하는 훈련을 단련시키는 공간
그리고 보다 중요한 사실은
북한산성의 또는 한양도성의 창고의 역할
그것들을 배우 지역에서의 창고의 역할
또 나중에 사실은 총영청이 거기로 옮겨오면서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이런 것들이
아직은 발굴이나 이런 것들을 위치 비정만 돼 있지
사실은 정확하게
그 유적이나 이런 것들이 발굴이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향후에는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좀 보호 대상에 좀 포함돼야 되겠다
그리고 전제 조건은 사실은 말씀드린 서성과
동쪽에 있는 동성 부분이 이제 먼저 보호돼야 되겠죠
그런 것들이
이제 통합적으로
보호가 될 필요가 있겠다라고 하는 거고요
두 번째로는 사실은 이제 북한산성 문수봉하고
보현병에서 이렇게 하나의 성과학 라인을 공유하고 있는데
뭐 이런 사례들은 사실은 굉장히 많죠
외국에도 있을 겁니다
왜 그러냐면
나중에 덧붙여지거나
이러면서 그 뭐 이 기존의 성격들을 이제 공유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덧붙여 나가는 방식은 뭐 유럽이나 이
아시아권에서 조금 흔하게 있는 것 같아요
굳이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이 차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것들을 연결하는 형태적인 모양이 굉장히 연주형으로
굉장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그런 차이들이 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례들은 좀 차별성이 있는 것 같고요
세 번째, 탕춘대성의 보호 관리를 위해서
그리고 이것들이 한양도성, 북한산성,
지금 연흉대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면
가장 시급한 게 무엇일까
각각의 유산들에 대해서는
관리를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다
탕춘대성은 상대적으로 조금 약하지만
최근에 관심 때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지는 못했는데
이것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경기도와 서울시
그리고 고양시가 같이 협력을 해서
이것들을 통합적인 관리체계로 끌고 가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끝으로 이것은 뭐 그냥 박현석 선생님
저기 그냥 소외를 말씀드린 건데 사실 한양도성 18
.6KM 지금 탐방
지금 길라자비에서 두트 잡으면
하루 10시간 돌아서 한 바퀴 돌죠
사실 중간중간에 끊어져 있기는 하지만 14
.5KM 정도
전체 3분의 2는 지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잘 탐방할 수 있고요
사실은 그런데
탕춘대성이 서쪽에 있는 서성 부분은 사실
접근이 쉽지가 않아요
상명대 뒤쪽으로
이렇게 펼쳐지는데 이 홍지문에서 바로 접근하는 것들이
좀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은 좀 개선할 필요가 있고요
상대적으로 이 동쪽에 있는 사실은 보현봉부터 형제봉
그리고 보토현을 지나서 구준봉 이렇게
그리고 부각곡선까지 이어지는 이 부분은
사실은 보토현이라고 하는 부각터널까지는 가능한데
그 이유는 또 군부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
문제 탐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구요
후악 칸 산성 아주 잘 돼 있죠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이제 어
나중에 통합적으로
또 탐방로를 정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그 조금 전에 말씀하신 그 두 번째 질문 중에서 성벽
외광 나이를 그 공유하는 성과 기회가 있느냐 하게 되면
우리가 성곽을 분류할 때
단곽식, 복곽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복곽식 성곽이 거기에 해당이 되고요
이후 고려를 지나면서 산악산성이 결합이 되거든요
그 이후에 조선시대 때
안착이 되게 되면
바로 복곽식의 공유벽이 함께 나타나게 됩니다
예컨대 성남에 있는 남한산성 같은 경우
거기에 해당이 되고요
원성과 외성 부분이 되겠죠
그리고 평양성 같은 경우도 북성, 내성,
중성, 외성 할 때 역시 복각의 구조의 사례가 있습니다
일단 추가 질문에 대해서는 그 이후
자유토론 시간에 또 하도록 하고요
약정토론 네 번째
이찬희 교수님의 발표에 대해서
김사덕 교수님의 토론이 있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김사덕입니다
그 탕춘대성 홍지문
오관수분의 암석학적
특징 및 보존 상태에 관한 이찬행
교수님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그 발표자께서 현장 조사와 분석을 통해 가지고
암석학적 특징이라든지 보존 상태,
그 다음에 보존상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셨습니다
그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한
장기적 보존 방안에 대해서 질의를 하겠습니다
그 발표자께서도 지적을 하셨지만
은 저도 마찬가지 되겠습니다
그 현재 그 오관수문을 가보시면 은 표면 상태
그 다음에 오관수문 하부를 보시면은
그 표면은 내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년 제가 알기로도 2008년
17년 10년 주기로 지금 뭐 그 세척하고
보존치리를 하고 있지만은
그것은 제가 생각해도 임시 방편이 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장기적으로 이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 조사와 진단을 통해 가지고
수리가 시급 하다고 이렇게 판단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상황에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 현대 들어와서
복원했는 부분이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뭐 ICDP 공산성이라든지
이런 부분도 지금
과거에 그 기존의 성곽이 남아있는 부분은
지금 뭐 붕괴됐거나 그렇지 않는데
최근에 이렇게 복원된 부분에서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판단하기에는 이 그 오관수문도
1977년도에 복원 시에 사용하는 뭐 콘크리트
몰탈 같은 영향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할 걸로 이렇게 판단됩니다
그래서 이 그 이 몰탈에 대한 이 표면에 오해
물 발생 원인에 대해서
그 좀 정밀하게 조사와 진단을 해 가지고
대책이 강구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1977년도 오관수문 복원에 사용하는 재료하고
그 다음에 방법, 도면 등 이런 검토가 필요할 거고요
그 다음에 충전하고 몰탈 상태
그 다음에 강우시의 물 흐름이라든지 배수 상태
그 다음에 필요하다면 배수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든지
여러 사항에 대해서
조사와 진단을 통해서
보수를 근본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 어떤 조사와 제가 뭐 여러가지
저 막 이야기를 했지만은
그 진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필요한지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교수님
직접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분야에 종사하셨던 분이라서
내용을 잘 이해를 하신 것 같고
또 질문을 굉장히 어렵게 하셨습니다
답변이 굉장히 난감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좀 이해를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실제 오관수문을
최근에 보신 분들께서는 여전히 백화현상과 함께
흑화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주기적으로 세척을 하지 않으면
이것은 미관을 상당히 이제 흐리게 될 텐데
실제 이것만 가지고
손상 상태를 평가하는 것은 그 부분에 해당되는 일이죠
안에 있는 석재의 건전성은
어떤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 제가 판단할 때
오관수문이 그렇게 표면은 지저분하게 변색이 돼 있고
문제가 많지만
석재 건전성은 나름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 지금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정밀 조사와 진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
물론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을 좀 더 지연시키고
덜 녹아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있고
두 번째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은
이런 오염물질을 양산해내는 재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이것을 헐고
다른 물질로 대체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례는 국내외에 많이 있습니다
뭐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지만
현 시점에서 본격적인 해체를 통한 보수를 검토하는 것은
저는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좀 더 관찰하면서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지연을 시키면서
덜 녹아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한데
앞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77년도에 있었던 수리
복원의 시공 도면이 있어야 됩니다
설계 도면만 가지고는 안 될 일이고요
시공 도면과 함께 재료의 사용내역
그리고 그 보고서를 정확하게
분석을 해서 방법을 찾아야 될 것이고
두 번째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계들을 좀 이용을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산업용 내시경
저희들이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초음파
또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영상 장치들이 있죠
그래서 그 안에 매움 상태가 어떻냐
정말로 잡석을 썼는지 점토를 썼는지
아니면 그야말로 콘크리드 모탈을 썼는지
그리고 그 내부에 있는 물질을 가지고
물과 특히 강수입니다
반응 실험을 해서
이들에 대한 모델링
과정을 알아내는 것이 지원할 수 있는
해답을 얻는 길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고
근본적으로 제거가 어렵다면
결국은 상판에 있는 암석들
사이사이에 방수
매질을 쓰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당연히 근본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국내에도 그런 사례를 많이 썼고요
외국에도 많이 썼습니다
그러면 이런 방수 매질을 수명이 닿을 때
다시 교체하고 바꾸고 이런 방법이 검토가 될 수 있겠고
또 하나는 유지
관리에 필요한 매뉴얼을 좀 빨리 만들어야 될 일입니다
마르고달토록 이런 일들이 생기게 될 텐데
그때마다 허둥지둥할 일이 아니거든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을 우리는 알고 있고
예측을 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임시 처방을 한다는 것은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매뉴얼을 빨리 만들어서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렇게 좀 말씀드릴 수 있겠고
다시 기회가 안 올 것 같아서
한 말씀 더 드리고자 합니다
실제 이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고요
제가 생각할 때는 이 탕춘대성
그 자체에 대한 오한수문이나
홍지문보다는
현상을 공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이런
절차들이 좀 진행이 되고 손상 과정을 조금 밝히고
실제로 원형을 유지하는 부분이 많지만
제가 돌아본 바로는 손상된 부분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그야말로 이제 디지털을 이용한 기록
그리고 관리 체계를 구축을 하고
앞으로 차근차근
대응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또 중요한 것은 아닌가
이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어떻게 답변이 되셨는지요
예 그 일단
그 약정 토론은 이렇게 한번 그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이찬희 교수님의 발표문을 보면서
깜짝 놀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홍지문과 그 오관수문이 복원되어 있는데
바로 그 오염원이
그 상부에 있는 콘크리트가 바로 그 저수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그 저희가
그간 얼마나 유적을 홀대했는지를 갖다가 보여주는
그런 대표적인 사례 같습니다
비단 이군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진 현상이겠죠
1753년에
탕춘대 성을 갖다가 다시 수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54년에 또 마무리 짓게 되죠
그럼 그 기간에
한양도 성의 흥인지문부터
그다음에 광인문
구간도 역시 대규모로 수계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관수문 옆에 이관수문에 대한 보수라든지
치성을 130부마다 설치해서 전체 6개를 동쪽
벽에 설치한다든지 이 구간의 수축이 마무리된 다음에
바로 탕춘대성에 대한 공사도 역시 마무리되는 것이죠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동국여도에 나오는 그 도성 연흉
북한 합도 라고 하는 그림으로서 접할 수가 있구요
이것은 하나의 도성 방어 체계의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거 왜 이런 도성 방어 체가 필요했을까
하게 되면 잘 아시다시피 양 난 이후의 민심
특히 도성민에 대한 위민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민 공수로 를 통해서
이제 한양도성을 굳건히 지키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숙종 때
이후의 활발한 축성 사업과 함께 그 중심인 한양도성
북한산성 그 다음에
탕춘대성으로 이루어지는 방어체계에 있어서는
총집결체가 하나의 완성으로써 드러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자 그럼 왜 숙종 때 갑자기 이렇게 이루어졌을까
하시게 되면 잘 아시죠 그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장을 한 후에 정충리 약소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조항이 바로
조선은 앞으로 신구
성원을 수선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체 성을 고쳐 쌓거나
새로 쌓는 일은 불가능했었죠
이후 청의 자문형으로 인해서
바로 외구 침입에 대비하라는 것을 구실로 삼아서
축성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양도선에 가시게 되면
네모 빤듯한 돌로 돼 있는 한 척
한 척짜리 돌이
바로 그 당시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고요
이후 영정조를 지나서 순조때
이것이 한 척으로 변화하게 되죠
두 척으로 변화하게 되죠
그럼 이러한 전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우리 탕충대성의 자리는 어떻게 매김할 것인가 하게 되면
역시 고고학적인 조사가 선행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고고학적 조사가 현재 발표에서 빠지고
문헌과 그 다음에 명칭 문제,
그 다음에 자연과학적 분석 문제로 접근하다 보니까
우리는 한없이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서 접근할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주최 측에다가 잠깐 요구를 했습니다
현재 그 탕춘대성에 대한 발굴 조사 시작했기 때문에
그 현황과 그 다음에 현재까지의 성과는 어떤 것인지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조치욱
선생님께서 간단히 말씀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현재 탕진 대형 발굴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역사법원의 조치욱입니다
교수님께서 설명을 해주셨듯이
어 짧은 시간에 조사 했기 때문에
지금 성과를 말씀드리긴 좀 어려울 거
어려움이 있을 것 같구요
저희가 5월 23일에 찜 착수해서 시굴 조사
한국 안과 절개 조사
한국 안 총 2구간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가 간단할 경과
만 말씀드린 아마 수준이 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어 치구 간에 대한 조사는 지금 이제 시구
트위치 2개 소를 설치해서 하강 조사를 실시 했구요
안방 명까지 하 하강 조사를 실시했고
성벽의 뒤체험부 약 1 .3 메타에서 1
.7 메타까지 어 뒤체험부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매입층 이라고 보이는 층위에서 어
근데 쓰레기 뜻들이 좀 나와서
이게 한번 중간에 한번 손이 타지 않았나
좀 판단하고 있구요
절개 조사 구원
같은 경우는 지금 조사 중이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어 역시 치고 안과 똑같이 인위적
그 안 반면에 인위적으로 절
토해서 뒤 체험을 하기보다는 다
대동서 약의 자연지사를 이용해서 성벽을 쌓고
뒤에 뒤체험
불에서 성벽을 유지하는 형식을 취했던 걸로 지금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 조사는 아마 날씨만 더 준다면
6월 말 정도까지 조사가 진행되면
그 뒤에는 뭐
일반의 현장을 좀 오픈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현재
조사된 경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셔서
조금 더 구체화되는 느낌입니다
이왕 조사하시는 중에
조금 전에 탕춘대성
동쪽 성벽에 대해서 김영수 교수님께서 언급하셨잖아요
그쪽 지표에서도 같이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
그렇게 답변하시면 안 되죠
예산이 허락하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걸 원한 겁니다
김용수 교수님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 주셨거든요
그러면 현재
이렇게 고각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탕충대성의 석축
구간이 있는 반면
그 반대편은 성벽이 자연 절벽을 이용한 보토 구간입니다
그럼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시각을 확대했을 때
아까 세 개의 고리라고 말씀드렸죠
한양도성, 그 다음에 탕춘대성,
그리고 북한산성
그럼 탕춘대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의용 선생님께서 산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한양도성은 평지성
아니면 평산성이 되는 거고요
그 다음에 탕춘대성은 산성이 되는 거고요
그리고 북한산성은 산악산성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일련의 삼한 고리 형태의 도성
방어책에는 어디서 왔을까?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발표문을 읽던 중에 나름 이것은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통적인 축성술이 그대로
평면으로서 나타난 것이구나
하는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백제는 풍납토성이 있고요
몽촌토성이 있고요
그리고 배후에 고험처인 남한산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임진강 유역의 육개토성이 있고요
칠중성이 있고요
그리고 고험처인 감악산이 있습니다 고구려 같은 경우는요
국내성이 있고요
그 다음에 환도산성 산성자산성이라고 하죠
그리고 배후에 또 패왕조산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구조를 병렬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고구려
후기의 평양성이고
이것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고려대의 산악산성으로 발전을 해서
현재 숙종과 영조연간의 방어체계로서
구현된 것이 아닌가 이 또한
오유부위로서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제 나름대로 생각을 좀 해보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드릴 말씀을 많은데
뭐 이 정도로 하고요
그 오늘 꼭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최 측에서 저한테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어요
어렵진 않습니다 탕춘대성이냐 연흉대성이냐
근데 다수결로 할까요?
민주적이긴 해요
근데 학술적 근거라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일단 제가 첫 번째 발표해 주신
정혜연 선생님께 마이크를 좀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사실 명칭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사실은 하고
오지는 않았고요
근데 이제 여기 와서 선생님 발표 듣고
또 우리 김병련
선생님 토론문을 보면서 이 명칭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제가 이 발표문을 주로 준비하면서 비변사 등록, 승정원
일기, 조선왕조실로 저희가 다 검색이 되니까
근데 제가 실제로 검색하면서 되게 놀랐던 게 뭐냐면
사실 성자는 다 붙이지 않고요
탕춘대에다 성을 축조하자
이제 이런, 오히려
탕춘대라는 용어가 훨씬 더 많이 나오고요 이 자료에는
그리고 연흉대로 이름을 바꾼 다음에도
사실 탕춘대나 연흉대가 같이 나오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원승정원일기
이런 지필 방법상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 사실
김병룡 선생님은 연흉서성이 지도나
이제 이런 부분에 훨씬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꼭 연용 대성이
더 공식 명칭은 좀 조금 더 고려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은 이제 그 말씀도 저는 상당히 어
아주 타당성이 있지만
어 제 생각에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그 문화재 명칭을 따지는 것은
어떤 그 역사적인 자료
그 다음에 오늘날의 관점이 저는 같이 포함이 돼서
그 문화재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명칭을 선택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 측면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그래도 연흉대 성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아까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서성으로 했을 때는 동성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든지
구체화되면 또 다시 문화재 명칭을 고쳐야 되기 때문에
연흉대 성이라고 하면 좋겠고요
그리고 이제 서울 짜는 저는 좀 빼야 되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이미 여기가 조금
이제 그 고양시 도 포함이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또 어떻게 보면 경기가 가며 하고
좀 연관도 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서울을 빼고
연흉대 성이라고 좀 하는 것이 좀 더 마땅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요
그 이것은 좀 약간 다른 문제인데
오늘 선생님께서 한복
문을 인조 때까지 올라와 하셨잖아요
근데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생각했냐면
사실 자료를 보다 보니까
저도 그 저기 한복 문을 쌓는데
자꾸 그 개짜를 개
짜라고 하는 용어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제 숙정 때도 그렇구요
그래가지고 너무 좀 이렇게 좀 약간 이상하다 했는데
저도 그걸 밝히지는 못했는데
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거기 조지서가 있었잖아요
조직 그 탕춘대
그 창고를 그 만들면서 조지서를 위쪽으로 옮기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지금
인조 때 만들었다고 하는 그 성이
사실은 한복문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하는 어떤 그 탕춘대 하고
연관된 성각 하고
영가 성 창고 하고
생각하고 연관된 걸 알기보다는 조지
서랑 관련된 그 그 조지서를 조금
그래도 이렇게 뭔가 바운더를 하기 위해서
거기다 성문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저는 사실 사료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같이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더 조사는 해봐야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불현도 질문을 드렸는데
준비하신 듯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 역시 토론자이신
김병윤 선생님께서 추가
질의가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추가 질의라기보다는 약간 보충되는 이야기인데요
조선후기법전에 나오는 연용대라는 표현은
기본적으로 지명입니다 지명이거나
아니면 총룡청의 별칭으로 사용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총룡청 중에서도 청사가 여러 군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아는
그 위치에 있는
총룡청의 어떤 군영의 건물들을 지칭할 때
그 명칭을 쓴 겁니다
그래서 그거하고 선거하고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요
사실은 우리가 조선
후기 기록에 보이는 탕춘자라는 표현이 그렇게
많이 보이는 이유는
그 일대에 있는
그 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 총룡청이라는 군용과
그리고 총룡청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북한산성 축성 때부터
거기 들어섰던
일련의 창고군이 들어서 있던 그 지역 전체를
우리가 지금
조선후기에는 숙종대 이후에는 탕춘대라고 부르는 거나
아니면 연흉대라고 불렀던 거예요
직접적으로 성과와 관련된 명칭이 아니에요
그건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여기를 사적으로 지정을 했을 때
연흉대라는 이름을 강조해서 만약에 사적 지정을 한다면
제 생각에서는 조선후기에서도
거기에서보다 성벽 자체보다는 충룡청이 들어져 있고
그 이전에 들어져 있던 창고군이 일련의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
단위의 창고가 들어서 있던 그 지역 일대를 조선
후기 중시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 기록이 많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성벽 위주로
우리가 지금
사적 지정을 하는 게 맞는지도 고민이 필요해요
특히 이 고민이 왜 필요하냐면
조선 후기 군용 중에
군용의 전체 사진이 남아있는 군용이 충룡청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흔히 탕춘대라고 이야기하는
연중대라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지역이고요
그러면 지금 세금종
초등학교까지 포함해서
그 지역을 포괄하는
우리가 사적 지정을 추진을 해야 될지
그런 부분도 고민이 필요해요
사실은 조선국에는 그걸 더 중시했기 때문에
성벽 자체보다는 성벽은 사실은 지금
여러 가지가 이야기 나오지만
인왕산 반대편 사면에 있는 건 투루예요
성벽 자체가 그렇게
아주 복잡한 공정을 거쳐서 축소한 건 아니고요
오른쪽 사면에 있는 성벽도
사실은 그렇게 고난이 된 성벽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보면
그 전체의 공간성, 의뢰가 펼쳐졌던 공간도 사실은 세금정
초등학교에 있는 그 주변이고
성벽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적을 지정할 때
세금정 초등학교를 포함해서
그 연중대의 공간적 특성, 의뢰가 벌어지고
군사장애 요충시설이 핵심적으로 들어서 있는
그 지역까지 포괄하는 명칭
혹은 그 지역을 포괄할 수 있는 어떤 적절한
그게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전 해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성을 강조하려는 의미가 아니고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대한 어떤 지적을 어떻게 검토를 해야 될까
그 문제고요
그리고 동성이 나올 수 있으니까
지금 서성이라는 명칭을 안 된다는 건 동의하기 힘든 게
동성 문제는 사실
예전에 종로구청에 지표조사
보고서는 다 지금 나오는 이야기예요
성벽은 없지만
지형상 거기에는 산이 능선이 있기 때문에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성 성벽을 안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역이
그런데 조선시대 때
이미 풍천유양 같은 송규빈이 그 지역에 지형이 높아서
그걸로 못 넘어오지만
나무를 좀 더 심어서 확실히 차단을 하자
그런 논의도 있어요
근데 그게 모두 실제로 실행이 안 되기 때문에
서성벽만 만들어지고
그래서 지도에도
아예 그 구체적으로
지금 연중서성이라고 표기한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연중서성이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문헌상의 용래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된다는 말씀을 드린 거고요
그 점에서 두 분
선생님이 영룡대성이라고 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저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보충 설명을 하시다가
급전환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정적인 자료들을 좀 봐야 되거든요
그래서 과연 현재
탕춘대성에서 볼 수 있는 금속문자료는 무엇인가 했더니요
홍주문에 있는 각자 성석밖에 없습니다
숙종 41년에 1715년에 새겨 놓은 것이죠
그 다음에 추기가 있었고요
그 다음에 뭐 잘 아시는 왕조실록이라든지
비번사등록이라든지 승정원일기 등이고요
그리고 1921년에 또 홍수로 유실이 돼 버렸어요
그리고 1976년과 77년에 다시 정비 복원이 되었고요
그때 정비의 주체는
서울시와 그다음에 국보건설단이었습니다
시대적 상황을 잘 이야기해주는 회사 이름 같아요
국보건설단 또 그 해에 홍지문 및 탕춘대성
이렇게 이름을 갖다 지어서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33호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명칭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논란들이 나오고 있는데
현재 그 발표와 토론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닥은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닥에 대한 그런 명칭들도 역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선 접근하는 것이 좀
더 온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탕춘대성의 동쪽
성벽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수반이 되어서
이를 가지고 확정하는 것이
좀 더 근거와
실증을 겸비한 명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플로우에서 한 분 정도 질문을 좀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손 들고 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아 그 여기 지금 질문이 없으시니까 요
제 수업 방식이 침으로 쓸 땐 지정을 하는 거거든요
그 남한산성 세계유산 지정 하는데
많은 공이 있으신 노영균 생 중 계시지 않나요 아,
넷 배셨군요
네, 네 자, 그럼
저는 사적 지정과 그 다음에
세계유산에 대한 제안을 좀 들어보려고 했는데
또 빠져나가셨네요 자,
제가 오기 전에 많은 걸 준비했어요
어떻게 이 한 시간을 좀 알차게 함으로 인해서
탕춘대성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많이 가려져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부각시킬 수 있을까 했을 때
첫 번째는 고고학적 조사가
이제 첫걸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또한 학술심포지엄도 이제 첫걸음을 뛰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또 어떤 방안을 가지고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봤습니다
2016년도에 탕춘대성보종관리종합계획을 세웠습니다
자 거기 보니까 다 나와요
벌써 2016년도에 246에서 247쪽이거든요
딱 정리되어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실현성 있는 사업 추진을 위한 단계별 목표
설정에서 단기와 중장기로 나왔습니다
첫 번째 단기는 목표가 유적조사 및 학술연구,
기초정비, 유적정비,
안내시설 설치예요 어려운 프로세스 아니거든요
중장기 계획은요
유적정비 및 시설정비,
지속적인 유구정비 및 활용체계 구축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역시 어려운 프로세스 아니거든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실천이 좀 더딜 뿐입니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지천
르네상스 선도사업으로 인해서 홍재청과 홍지문
일대 역사자원
활용을 위한 명소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야간 도복
관광 코스 개발 등
많은 관광 콘텐츠도 포함이 돼 있어요
활용은 참 잘합니다
근데 어떤 근거를 가지고선 활용을 하죠?
이제 탕춘대성은 그 기로에 서 있습니다
활용도 중요하지만
사적도 중요하지만 세계유산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현황을
학술조사를 통해서 밝혀내고
이것을 원형 고증으로 삼아서 진정성
그 다음에 완전성
그 다음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
outstanding OF
universal value라고 하죠
이를 통한 정비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시민과 국민과 함께하는 역사
교육의 장이 된다고 하면은
바로 한양도성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꿈
북한산성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꿈을
탕춘대성과 함께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그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 주신 발표자
토론자 그리고 스탭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드리고요
또 늦은 시간까지
객석을 지켜주신 청정
여러분께도 더욱더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오늘 학술심포지엄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탕춘대성 : 사적 승격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 2022년 6월 16일 오후2시
탕춘대성 : 사적 승격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 2022년 6월 16일 오후2시
2022-06-16
14:00~18:00
서울역사박물관 1층 야주개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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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명 : 탕춘대성 : 사적 승격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
일시 : 2022년 6월 16일 오후2시
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1층 야주개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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