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훈련도감 무예 재현행사 - 행사 1일차
한양도성 전통 무예와 만나다 2021 훈련도감
무예 재현 행사를 찾아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행사 사회를 맡은 MC 김일희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오늘 훈련도감 무예
재현 행사는 코로나19의 엄중한 상황과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
지침 및 마스크 착용 방안을
방역지침을 엄격히 준수하여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크 착용에 따른 정확한 언어
전달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행사는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함께하는 2021
훈련도감
무예 재현 행사입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의 전통
무예를 여러분들께 선보이는 의미 있는 행사입니다
한양도성 전통무예와 만나다
라는 주제로
아름다운 한양도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역동적이고
에너지틱한 전통무예가 함께하는 이번 행사는 아쉽게도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서 무관중 비대면 행사로
여러분들이 지금 보시는 것처럼
서울시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라이브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훈련 도감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발발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된 것을 계기로
조총 등 새로 도입된 무기와 변화된 전술로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창설된 군형입니다
이곳 훈련도감에서는 정조의 왕명에 따라 편찬된 표준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24가지의 실전
전투 기술을 연마하였다고 합니다
이번 행사는
이러한 무예도보통지의 전통무예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주 뜻깊은 행사입니다
지금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곳은요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위치하고 있는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입니다
오늘 DDP가 위치한 이곳 일대는 한양도성의 한 축이자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인 훈련원이 있었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또한 효종 때 동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을 이곳에 설치하여 군사들을 주둔시켰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이 훈련도감 중
하도감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니까
왠지 모르게 훈련도감
군사들의 이런 용맹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0월 2일과 3일 양일간 펼쳐지는 이번 행사는요
온라인을 통해서
훈련도감과 그에 따른 전통무애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만나실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럼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오세훈 서울시장님이 축사를 보내셨습니다
시장님의 축사 영상으로 함께 하시죠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서울시장 오세훈입니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10월의 첫 시작을 한양도성문화재와 함께 하게 돼서
정말 기쁘고 뜻깊게 생각합니다
한양도성문화제는 조선시대에 도성 안팎을 걸으면서
주변의 경치를 즐기시던 그 풍습,
순성이라고 하는 풍속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행사로
남녀노소 누구나 안전하게
성과길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올해 문화제는 순성, 바람을 담다를 주제로 개최되는데요
특히 코스모스 가득한 인왕순성길에는 따뜻한 위로와
마음을 담은 명상
오두요인 순성처방전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비대면 순성챌린지를 통해서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올해는 조선 후기에 수도
한양을 수호했던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의 용맹스러운 무예도 첫 선을 보인답니다
과거 훈련도감의 본형인
하도감터에 위치한 DDP를 중심으로
한양도성 곳곳에서 전통묘회를 재현하며
성과계 방어기능에 주목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제9회
한양도성문화제와 10월 2일과 3일에 개최되는 훈련도감
무예재현 행사에
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양도성은 지난 600년 동안
서울의 역사와 문화생태적 가치를 온전히 품으면서
서울시민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왔습니다
이제 서울시는 시민 여러분과 함께
한양도성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고 알려나가고자 합니다
서울비전 2030에서 선포했듯이
한양도성의 가치를 탕춘대성과 북한산성까지 확장해서
서울의 유산을 넘어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유산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1396년 전국의 백성들이 모여서
국운번영과 국태미란의 영혼을 담아 도성을 축성했듯이
그 마음을 다시 되살려서
서울의 매력과 한양도성을 널리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오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서
직접 축사를 보내주신
오세훈 시장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자 그럼 오늘 첫 번째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이곳 무대에서 진행되는 역사
콘서트 훈련도감 그날입니다 KBS 역사
저널 그날에 출연 중인 최원정 아나운서와 신병주 교수님,
박금수 박사님께서 조선시대
훈련도감과 전통묘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고 합니다
역사 콘서트 훈련도감
그날, 최원정 아나운서를 소개합니다
김차 한 박수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토크
콘서트 시청해주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보이시죠? 목소리 잘 들리고요
저는 역사저널
그날 진행을 맡고 있는 KBS 아나운서 최원정이고요
이곳은 대한민국 디자인 산업의 중심,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입니다
우리가 DDP라고 이렇게 하는데
DDP가 또 다른 의미가 있대요
D가 Dream, Design, Play
꿈꾸고, 만들고, 누린다 이런 또 깊은 뜻이 있죠
오늘 꿈꾸고, 만들고, 누리는 후회 없는 시간 알찬 시간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실 두 분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신병주 교수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공국대사학과 신병주입니다
이렇게 또 화창한 날씨에 DDP에서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이런 프로그램을 함께 하게 돼서
상당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 왼쪽에는 박금수 박사님
본인 소개 좀 해주세요 뭐하시는 분이신지
제가 뭐하는 사람일까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전통 군용무애보전의 이사람이 있는 박금수고요
전통 무예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도감
무예제언 행사에 참가하게 돼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 방역지침,
마스크 착용 방역지침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실
토크쇼 할 때는 입을 가리면 좀 불편하긴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진짜 최연정입니다
진짜 신명지겠습니다 얼굴 확인시켜드리려고 잠깐 빼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이고 잘 들리시죠?
네 자 시청자 여러분
지금 DDP에서 이제 저희가 토크쇼 진행할 텐데요
여기는 약간 글로벌 어떤 미래 산업 이런 공간이잖아요
여기 조선 역사 전문가 두 분이 왜 나오셨을까?
참 안 어울린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안 어울려요? 뭔가 좀 어색하다
아니 KBS
대표적인 역사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아나운서가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왜 나오신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뒤에 뭐가 보이세요?
그러니까 한양도성 그렇죠 한양도성도 보이고요
그 뒤에 우리 DDP 건물이 보이죠?
네 그렇긴 하네요 이 장소가 굉장히 역사적
층위가 많이 턱혀 쌓여있는 그런 장소예요
저도 사실 관련이 많이 되어 있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서울의 미래와
조선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DDP가 되겠습니다
그렇죠, 교수님 맞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 박금수 박사님이 잘 설명을 해주셨는데
우리 여기 이 지역,
우리가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곳이 사실은 조선시대
역사하고 상당히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이 DDP 자체가 원래 이곳에 있었던 동대문
운동장
지금 여기서도 바로 조명탑도 보이죠
예전에 야구장에 있었던 조명탑 인데
저걸 철거하지 않은 거예요
조명탑 한번 볼까요 조명탑 와 그렇네
저것은 그대로 남겨둬서 이곳이 야구장으로 활용되었음을
그리고 이곳은 정말 역사적으로 프로야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프로야구 개막전 삼성하고
mbc 청룡 개막전이 벌여졌어요 mbc 청룡이요 mbc
청룡 언제쯤 개막전이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 인데
바로 이 ddp 건물이
2008년에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고 만들었어요 이 과정에서 사실
그렇다면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때 바로 이런 조선시대 관련 유적이 많이 나오니까
현재 이 어울림광장하고 조선시대 유구전시관
그리고 동대문 역사관에
이런 유적들을 또 이렇게 전시하고
그래서 한번 이 DDP에 오신
분들은 이것도 한번 함께 눌러보시면
그야말로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DDP
중앙어울림광장에 유구전시관이라는 게 있는데요
그 유구라는 단어가 여기 옛날 건축물이 있었다
그런 어떤 실마리를 알 수 있는
자취들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거잖아요
이렇게 정말 뒤에 뭐 또 있는지
대신 미래 도시 같은 건물 안에
또 그런 어떤 역사의 흔적이 있으니까요
좀 와서 보시는 거 굉장히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원래는 이곳에 이제 흥인지문이 있죠
우리 동대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흥인지문 이
주변은 일제시대 강점 때
거의 대부분 이제 파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다 보니까 이 한양도성하고
바로 이 2칸 수교가 이제 발굴이 된 거예요
그래서 바로 지금 뒤편에
지금 이 칸 숲이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요
두 칸짜리 두 칸짜리 저게
남산에서 흘러온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에요
사실은 더 큰 수문은 저 지금 흥인님 앞에 있었던 5칸
수문 5칸 수문 쪽으로
주로 이제 청계천 본류는 그쪽으로 이제 빠져나가고
5간 수문 이미지가 한번 있거든요 잠깐 볼까요?
저기 지금 동대문역
8번 출구에서 청계천으로 가는 오관수
교 아래 재현돼 있어요
그렇죠? 5칸짜리 수문 이 그림은 영조 때인 1760년에
청계천, 준천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요
그리고 그 행사가 끝나는 후에
이렇게 기록화로 남겼는데 이 그림은 준천시사
열무도 장면 중의 하나인데
지금 바로 이 청계천, 준천 할 때
지금 같으면 포크레인 동원했겠지만
그때는 보시면 소가 생기를 가지고 흙을 날랐던 저시대
사람들 고생했을 건데
바로 이게 지금
옥한수교도 지금
이렇게 옥한수문이 바로 근처에 재현되어 있고
그리고 이런 유적을
우리가 복원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는
원래 그 위치에 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요
그리고 대표적으로
한양도성 같은 경우도 상당히 낮게 복원이 되어 있는데
원래는 더 올라가야 돼요
그런데 이제 DDP 건물과의 어떤 조화라든가
이런 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좀 낮은 형태로
그래도 그 흔적만은 우리가 확인을 할 수 있다는 거
이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수문들이 있다는 거는
한양도성을 가로지르는 큰 물줄기가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약간 좀 상상이 안 가지 않으세요, 여러분?
여기에 저렇게 큰 수문이 필요할 정도로
물이 많이 흘렀다고요?
청계천 아시죠, 청계천? 복원됐잖아요
그 청계천이 흘러나가는 데가 바로 오간수문이고요
남산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이
사실은 서울 시내 물들이 다 청계천을 합류를 하는데
딱 한남한 이간수문을 지나서 밖에서 합류를 해요
그래서 이제 수문이 두 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 이쪽 지역이 물이 흘러나가는 지역이잖아요
지대가 낮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여기가 지대가 제일 낮죠
한양도성 중에서는 그래서 잘 보시면은 뭐
북쪽은 북한산이 맡고 있고요
서쪽도 모화관 쪽에 언덕들이 인왕산도 있고
남쪽은 남산이 막고 있고요
그런데 이쪽이 좀 낮아요
딱히 막아주는 방어 시설이 없어서
사실은 이쪽에 뭔가
이렇게 군사
시설들이 집중적으로
좀 배치가 되어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려고 파보니까
군사 시설이 굉장히 많이 나온 거예요
이관수문뿐만 아니라 자,
여기에 뭐가 관련된 조선 후기에
특히 뭔가 이렇게 군사시설
그리고 가장 큰 군형 혹시 이름 혹시 아시나요?
지금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럼 누구한테 물어보시겠어요?
시청자분들에게 물어보네요
근데 지금 바로 힌트는 나가고 있죠
오늘 제목이 2021년 후에 훈련도감 훈련도감
그날 오늘 타이틀입니다
뭐 뻔한 질문을 하셔서 정답
훈련도감입니다 대본에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
워낙 최은정 아나운서가
역사전을 그날 거의 7년 이상 하셨죠
그래서 사실 웬만한 역사전 문과보다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요
질문은 절대 하지 말아주세요
이것이 훈련원, 훈련 도감을 재현하는 의미가 있는 게
여기 그대로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이 노인들
공간에 말이죠
사실 우리가 조선시대 하면 상대적으로 문이 중시가 되고
무가 약화되었다 이런 이미지를 만들었잖아요
사실 조선시대에도
무에 대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이런 기관을 북초부터 설치를 했어요
훈련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했다가 훈련관이었다가
세조 때 이렇게 관제 개편을 해요
그러면서 이름이 훈련원이 된 거예요
훈련원이 되었는데
조선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보면
훈련원은 군사에 대한 시험, 무예 연마,
그리고 무경, 군사 학습서 같은 거죠
이런 일을 관장을 한다고 이렇게 기록이 나와요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도 여기 훈련원에서 다 관장한 거죠?
네, 그렇죠
이수진 장군이 일화를 보면
무과 시험보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그래서 그랬다면서요
그 대 이순신 장군이
이순신 장군은 또 재수생이라는 거
많은 재수생들에게 희망을 늦각기잖아요
그 장소가 바로 훈련원이었던 거죠 여기군요
그래서 조선시대는요 고려시대와는 다르게 선발을 했잖아요
무관이든 군사든 능력 위주로 시험을 했는데요
그런 제도를 다 준비하고
그리고 또한 군사 훈련도 많이 했었어요
그 국왕이 임금이 직접 군사 훈련을 주관을 많이 했는데
그런 여러 가지 절차들을 준비했던 것이
바로 훈련원이 되겠습니다
자 이러한 훈련에는요 가장 큰 것이 대열이라고 그래요
대열 큰 대자에다가 사열할 때 열 자를 써가지고요
그런 대열에서는 화포도 쏩니다
화포나 총을 쏘아요 여기서 이 자리에서요? 그럼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시방이라고 합니다
네?
시방
군사들이 짜는 뭐
사각형 원형 뭐 이런 것도 진법을 전도하고
그것도 특히 무관절 중심으로
장교들 중심으로 활쏘기 시험도 많이 봤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훈련원에서 준비를 했었고요 이 동대문
1 대 놓고 최적으로 훈련도감 공원이 있어요
아, 훈련원 공원
국립의료원 근처에,
거기가 바로 이 일대가 훈련원 자리였던 겁니다
자, 그리고요
우리가 앉아있는 이 성벽,
사실 안쪽에 하도감터가 있었어요 이 하도감이라는 것은
아래 하 자에다가 훈련 도감할 때 도감이거든요
그래서 훈련 도감의 여러 가지 분영이라고 해가지고
좀 나누어져 있는 여러 가지 군사 주둔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컸던 곳이 바로 하도감이 되겠죠
그래서 하도감 바로 이 성벽 안쪽에 있었는데
지금 이제 유구털 약간 옮겨 놓은 거죠
근데 이미지 자료로
제가 훈련원 하도감 자료를 한번 볼까요?
지도를 한번 준비를 해봤는데요
훈련도감의 분영
하도감이 자리한 지금 DDP DDP 자리
저 아래 바로 있는 거 이미지 자료 한번 볼까요?
저기 보시면 보이시죠?
오간수문, 니간수문 그 안쪽에 하도감 훈련원
이렇게 성벽 안쪽에 이렇게 군사시설이 있었던 겁니다
좀 더 들어가면 염초청이라고 있죠?
염초청이 화약 만드는 그런 일대의 군사훈련 장소가
그리고 무기고, 무기 제조도 다 여기서 했었던 거죠
그리고 이 하도감터에서는요
별기군이라는 게 1882년에부터 훈련을 해요
79대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렇죠
원래 별기군은 사실은 무예를 따로 익히는
그런 별기군들이 따로 있었는데
근대 어떤 그런 전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별기군이 창설이 또 별도로 됩니다
그 훈련 장소가 바로 하도감이었죠
근데 이제 교관들이 일본인 교관이다 보니까
그 당시에 별기군을 좀 외별기라고 약간 낮추어 부르는
그런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하면 훈련도감의 본부는 지금
서울역사박물관에 있는 자리
거기에 가면 훈련도감 본영구 표지석이 있고요
여기 하도감은 분영이라고 할 수 있고
훈련도감 분영은 북쪽의 부경이라 해서
창덕궁 쪽에 있었고
또 서영은 마포 쪽에 있었고 아까 지도에서 보셨죠?
염초, 청도 역시 훈련도감 소속이고
그리고 여기 하도감은 조선 후기 기록이 만기월함에 보면
훈련원은 동쪽에 위치했는데
훈련원이 지금 국립의료원 자리잖아요
그 동쪽에 위치했는데
주모가 꽤 커요 390칸이었다
이렇게 돼서
아마 그 흔적들이 또다시 발굴될 가능성도 있다라는 거
그것도 우리가 좀 알아두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서울
어디든 발을 딛는 그 아래는 뭔가 이렇게 역사
흔적이 유적들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 생각하면 좀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아무튼 지금 잘 따라오고 계시죠?
훈련도감 별기군 하도감 하니까
정신없어 하시는 분들 계실 텐데
훈련도감 그날 이잖아요
오늘 주제가 훈련 도감을 본격적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겠네요
그래서 우리가 훈련 도감의 역사는 사실은 임진왜란하고
깊이 관련이 있어요
왜냐하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훈련 도감이 없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중앙군제는 5위 체제라고
그러고 지방군 체제는 진관 체제
이거 밑줄 쫙 쳐놓으세요
이거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는데
그런 그 체제가 임진왜란 이전에 재승방략 체제라고 해서
전시의 중앙에 장군 이 파견이 되면
이렇게 하는 지방 에 있는 군대가 합류하는 방식 인데
이것이 완전히 와해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우리가 유사 시에 제대로 뭔가 군사동원이 어렵 겠다고
판단을 해서
바로 임진왜란 때 본격왜란 이후에 결과적으로
국가적으로 군형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대를 양성해야겠다는 피로에서 훈련도감
설치 논의가 시작되고 이루어져요
제가 한번 질문 드려볼게요
훈련도감 장소를 주도한 인물은 누굴까요?
선조 때죠 선조 때고
아주 유명한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그런 인물입니다
지금 시청자 여러분께 드리는 질문이에요 맞히고 계세요?
이순신 장군 하시는 분들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그렇죠?
정답은 교수님?
제가 힌트 드리면 이순신 장군하고 가장 친했던 분
누굴까요?
또 한 좀 더 힌트를 드려볼까요?
이순신 장군하고 가장 친했던 분이고
징비로이라는 기록을 전술하신 분
아마 이 시간에 들어와서 접속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고
아마 맞출 걸로 생각이 되는데요
바로 유성용이죠
우리 소예 유성용 선생이 임진왜란 중에
전란 극복을 위해서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내서 오는데 이 과정에서 바로 훈련도감
창설을 본격적으로 거내요
그리고 그 힌트를 어디서 얻었냐면
1593년 7월에 명나라 장수
낙성지라는 사람이
여러 진영에서
화포교습을 의뢰해서 이 포군을 양성하는 이런 것을 보고
우리도 저것을 본격적으로 해야 되겠다
해서 당시 왕이 선조에게 권위를 냈고
이것이 이제 실천이 되는 것이었죠
훈련도감 설치를 제안한 사람은 유성룡이다
이거 약간 상식 차원에서
오늘 꼭 하나 얻어가셨으면 좋겠고요
훈련도감, 쉽게 얘기하면 지금의 군대인 거잖아요
그렇죠? 군대인 거죠?
어떤 군인들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훈련도감의 대표적인 군인이라고 하면 삼수병이라고 있어요
삼수병 삼수 삼수에 있어요? 세 개의 수가 있어요
죄송합니다 포수 재수 말고
포수는 조총을 쏘는 사람을 포수라고 하고요
그리고 우리 전통적으로 활 쏘기가 강하잖아요
활을 쏘는 사람을 사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총이나 특히 활도 마찬가지지만
저기 가까이 오면 대응을 할 수가 없잖아요
특히 당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창검 들고 돌격을 굉장히 잘했거든요
그런데 그 대응을 하기 위해서 살수가 도입이 됩니다
그래서 포수, 사수, 살수 삼수병이 체제가 갖춰지게 되고요
이런 훈련도감을 운영하기 위해서 삼수미를 걷기도 했었죠
세금을 이들은 약간 직업군인 성격이 있었다면서요?
네, 그렇죠
원래는 우리가 농병일치제라고 해서
그냥 자기가 농사를 짓다가
한 두 달씩 와서 군사로 역을 쓰고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자기 경제적인 걸
옆 사람들이 도와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훈련도감이 우리나라 역사 최초로 약간 직업,
급료병 체제가 주어지게 되는 거죠
즉, 월급을 받고 다른 일을 안 하고
전문 군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얼마 정도 받으세요?
지금 우리 군인들은 한 50만 원 정도 받나요?
병장이 한 50만 원으로
병장이 아마 내년부터 100만 원 정도로
월급 오른다고는 전혀 100만 원까지요?
군대 다시 가고 싶더라고요
다시 가야겠네요 굉장히 많이 상승했네요
상당히 그래도 병사들의 월급이
예전에는 군대에 있을 때는 월급 받으면 정말 그러니까요
초코파이 하나
사 먹으면 다 없어지는 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러면 이 당시 훈련 동안 군인들은 어느 정도 받았어요?
한 달에 쌀 6마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양이죠? 아닌가?
사실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해요 쉽지 않았다
네 왜냐하면 여기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되니까
이거를 쌀로 다른 걸로 교환해서 먹고 살아야 되니까
좀 쉽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훈련 동안 군사들이 군인으로서 역할 뿐만 아니라
제조나 이런 농기구도 만들고 염색도 하고
다양한 상업활동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에는요
사실은 당시에는 한양에 먹을 게 없어서
굉장히 다들 굶어 죽는 상황이라서
먹을 것만 주면 일단 오겠다
해서 많은 군사들이 훈련도검을 만들고
급하니까 막 여기 현장에서 군사들을 모집을 하는데
일단은 기본적으로 도청을 쏴서 세반 이상 맞추든지
아니면 돌을 들든가
아니면 담을 넘든가
이렇게 약간의 실기 능력만 있으면 훈련원
군사로 채용을 한 거예요
잠깐만 이게 소총 쏴서 세 번에 한 번 맞히고
돌 들고 이게 시험 과목이었다고요?
네, 그렇죠
싸울 힘만 있으면 일단은 일본군과 당장 싸워야 되니까
그리고 월급 받고
많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러니까요
원래는 사실은 양인만 군인이 될 수 있었잖아요
농이나 천민은 절대로
이제 군사가 될 수가 없었는데 이 당시에는 뭐
천민 노비를 도 많이 오고 뭐 유생
승려 등등 모든 사람들이 자원 입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이런 군인들 중에서도 이렇게 우리가 의무병이
하지만 지금도 이제 군인들
이제 월급도 동급도 일부분 있고
특히 직업 군인 같은 경우는
실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하잖아요
훈련도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급여를 준다는 것
요즘으로 치면 이제 직업군인 예나
지금이나 월급을 탁탁탁 들어오는
월급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유성용이 이런 훈련도감
창설을 건의하게 된 것도 이 직업군인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또 조선 초기에 이런 군사 제도가 무너졌다
특히 병역 제도가 무너졌고
특히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을 해서
노비들 중에서도 정말 의지가 있고
원한다면 이런 사람들도 이제
직접 군역에 들어올 수 있게
군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어떻게 보면 획기적인 제도였어요
그런데 이제 조선소위까지도
양반은 사실 조선소위까지도 계속 군역 면제고요
특히 양반의 밑에 있는 노비도
이제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양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또 면제받아요
결국은 이제
군역 부담을 지는 사람은 농민에게 한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 부담도 훨씬 컸다라는 거죠
네, 지금 이렇게 큰 외란을 겪고 있는데
뭐 너나 할 거 없이 다 지금 군의 의무를 져야지
뭐 누군 되고 누군 안 되고 이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를 어떻게 보면
유성용 선생님께서 개혁 정신으로
좀 이걸 이뤄내신 거네요
그 당시로 보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런 거 뭐 양반 노비
뭐 이런 거 가릴 게 뭐 있느냐 가릴 때가 아니죠
노비도 그때 면천법이라 해가지고
천민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군인의 길을 걷도록 했는데
그런데 실제 이때도 어떤 해프닝까지 있었냐면
노비가 식후 군사훈련 받고 있는데
양반이 우리 집
노비야 하면서 막 데려가버리는 이런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발생을 하자
유성용이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오히려 이렇게 되면 양반까지 군역
부담하게 해야 된다라는 주장까지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훈련도감이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정예군의 산실이라고 하잖아요
이들은 과연 어떤 훈련을 받았을까
활 쏘기, 창 다루는 법 등등 예상은 됩니다만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게요
우리 박금수 박사님이 나오신 이유죠
조선군의 전문가 설명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훈련 동암에서 썼던 무기들을 한번 직접 살펴볼까요?
아 무기 가지고, 다 무기에요 맞아요
옛날에 저 역사전의 그날 편에서
이거 여러 번 한번 보여주셨었어요
제가 또 빈사부, 빈사부죠
역사전의 그날 만물과학 분위기에요 설명해주세요
참 재밌더라고 이 무기 얘기들이 무기가
그리고 다 특이하게 생겼어요
저게 무기야 싶을 정도로 이건 방패
이거 방패는 방패인데 등패라고 그래요 등패 네
그래서 이거 이제 등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볍죠
그래서 이제 방패는 이렇게 들고서 칼을 감춥니다
아 칼을 감추고
적들이 공격해오면 찌르고 앞에서 막아주는
그리고 또 쳤다가 빠지는 동그란 방패이기 때문에
이게 좀 편하게 할 수가 있어요
등패라는 무기를 좀 썼었고요
자 그리고 다음은 낭선이라는 무기에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예전에도 승리받을 때 이게 무기야? 어떻게 사용하는 거죠?
일단 가지가 많잖아요
돌격병이 왔을 때 무게 걸 수가 있어요
함부로 못 들어오게 하고 어때요?
제가 이렇게 앞에서 딱 지켜주니까 든든하시죠?
좀 시끄럽긴 해요
체력전환에서 전쟁터에서 시끄러운 게 좋아요
막 흔들면서 뭔가 적들이 함부로 못 오게 돌격병이
특히 일본군이 그리고 칼을 잘 썼잖아요
그런 칼들이 오면 이렇게 감아서 찌르기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휘저어서 접근을 막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 끝에 독이 발라져 있었어요
독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적들이 접근을 못하게 해주는 마치
우리 군사들을 보호해주는
담벼락과 같은 역할을 했던 거죠
그럼 이 뒤에는 뭐가 있냐
제가 세트로 갖고 나왔습니다
다음 세트는 바로
장창수가 그 뒤에 있는 거예요 이 장창은
이렇게 찌르는 무기죠 찌르고
물론 이렇게 방어도 가능은 해요
적의 무기를 걸어서 누르고 찌르기도 하는데
사실 공격에 최적화되어 있지
방어는 좀 불편할 수가 있습니다
훈련을 많이 해야 되는데 이 장창이 낭선의 뒤에서
그 등패의 뒤에서
이렇게 공격을 외만 집중할 수 있는
그렇게 훈련을 좀 받았고요
그 다음으로
또 많이 익혔던 무기가 바로 이것이 되겠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이것이 당파인데요
일반적으로 삼지창이라고도 말이죠
길이가 짧아요
길이가 짧아서 적들이 다가왔을 때
적의 무기를 걸어 제낄 수 있는 그런 무기가 되겠죠
당파 같은 것은 사실은 우리가 사극 보면 포절들
그냥 이러고 들고 있잖아요 맞아요 그거죠
바로 이러고 있다 적 깍! 죽잖아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가장 노련하고
눈에 살기가 있는 군사가 바로 당파를 썼던 거죠
왜? 무기를 딱 걸어 제끼어야 되니까
그래서 이러한 무기들을 많이 익힌 것은
바로 훈련 도감 중에서도 살수가 익혔던 거죠
제가 조총 쏘는 거나 활 쏘기도 좀 보여드리고 싶은데
여건상 그거는 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당시에 쓰였던 무기들
하나하나 역할들이 다 있어요 특징들을 살펴봤는데
이때 명나라 군사들의 전법 이런 걸 많이 모방했다?
좀 따랐다 이렇게 봐야 되죠? 네, 그렇죠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줍니다
군사들이 도와주러 오는데
첫 번째 왔던 김화병 위주의 원군이
평양선 전투에서 맥을 못 써요
그런데 두 번째 왔던 이 원병이 절강병들이 왔어요 뭐요?
절강병 네, 절강병 그렇죠
중국의 절강성 있죠? 네 곡창지대잖아요
거기도 왜구랑 싸운 경험이 풍부했던 거죠
그래서 중국의 명나라의 척계광
장군이라는 장군이 개발한 전법이 기오신서라는 책에
수록이 돼 있었어요
그런데 이 절강병들이 평양선 전투에서 보니까
일본군들을 그냥 아까 낭선 같은 걸로 쓸어버리는 거예요
그전에는 우리 군사들은 일본군을 보면 도망가기 바빴는데
이렇게 쓸어버리는 걸 보고서 저게 뭐냐
저거 반드시 우리가 입수해야겠다
해서 2차 원병을 이끌고 온 이 여성 장군한테
그거 좀 교본
좀 주지 그랬더니 이 여성 장군이 딱 잘라 거절합니다
군사기밀이다
그렇죠 군사기밀이죠
그래서 역관을 통했다는 얘기도 있고
어쨌든 2차 저차에서 기호신서를 빼냅니다 빼내서
그 중에서 군사훈련법이라든지 진법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병학진암이라는 병소로
우리가 훈련도감해서 다 소화를 해요
오히려 기호신서의 내용보다
병학진암의 내용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당시의 군사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사실
시각적으로도 굉장히 잘 만들어놓은
그런 병사가 병학진암이었고
모든 과정을 훈련도감해서
직접 주관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외군들은 조총으로 대항을 하는데
이건 약간 백병전에 적당한 무기들 아닌가요?
좀 아는 것 같죠?
그렇게 얘기하니까
군사 쪽으로도 거의 저희가 전쟁사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조금씩 무기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또 깨알 홍보하시네요
남들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아는 척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명나라 군수석고
훈련도 가면서
이거를 훈련하기 위해서 만든 게 사실 훈련도감이에요
신전법을 그래서 절강병법이라고 하는데요
절강병법은 사실 아까 보여드렸던 무해
이전에 사실 화포로 먼저 길을 확 죽입니다
이미지 한번 보실까요?
이미지를 한번 보시면 호준포, 불란기
이런 화포들의 이미지가 있어요 다음 이미지요
이게 호준포라는 이미지입니다
호준포라는 신무기인데
저것이 굉장히 가벼워요
조선이 썼던 화포는 굉장히 강했죠
하지만 배에서나 성에서만 쓰고
야전에서 들고 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커서 그래서 이런 박격부와 같은 오늘날의 호준포와
또는 불량기 같이 계속해서 연발사격을 할 수 있는
그런 화포로
먼저 적의 길을 죽이고서 제가 아까 보여드렸죠
그래서 단병 접전을 또 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단병 접전에 필요한 원항진 같은 원앙진?
네, 이런 전법을 도입을 했던 거죠
원앙진은 하객진 같은 그런 대열 방법인가요?
하객진하고는 좀 다르고요
하객진은 굉장히 큰 개념입니다
여러 가지 부대가 이렇게
또는 병선, 전선이 이렇게 딱딱 배열하는 방식이고요
원앙진은 일단은 딱 10명으로 구성이 돼요
10명? 10명이고 여기를 이끄는 원앙대, 대장이 있는데요
이것도 한번 이미지 잠깐 보시겠습니다
이미지 잠깐 보시면은
이게 기호신서에 나와있는 원앙진 배열법이에요
10개 맞네요
지금 무기들이 10개의 깃발이 하나 있죠
대장 11명이에요
그리고 한 명이 여기 안 나와있어요
총 12명으로 구성되는데
화병이라고 있어요 화병 불화자 써가지고
화병은 취사병을 말합니다 보급이 중요하죠
전투할 때는 취사병은 안 끼죠 다음 이미지 한번 볼까요?
이것이 이제 군사들이 실제로 무기를 잡은 모습인데요
맨 앞에 등패를 잡고 있어요 아까 보셨죠?
그 낭선 이렇게 앞에서 방어막을 형성하고
그 뒤에서 장창이 공격을 하고요
그 뒤에 삼시창 좀 나와 있죠?
삼시창들이 장창수를 보호를 해줘요
그래서 이 원항진의 원칙은
앞에 있는 병사를 뒤에 있는 병사가 꼭 보호해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서로를 돕게 했는데
이게 그냥 마음만으로는 잘 안 되죠
그래서 군율 엄격한 군율을 세웠어요
그게 어떤 거냐면은 뭐가 돼요?
혹시 옛날에 하지 않았나?
군율 글쎄
네 군율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죽는다 그렇죠
이게 원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어요
원앙새가 우리 전통 혼례할 때
인사시키는 새가 원앙새잖아요
왜 원앙새로 하냐면 금술이 너무 좋아가지고
한 마리가 죽으면 따라 죽어요
그래서 이렇게 원왕세를 놓고 혼례를 하는데
그 원왕진과 같은 원왕입니다
원왕진에서도
그래서 내가 보호해줄 군사가 죽으면 담당
병사도 같이 죽여요 진짜예요?
저는 그냥 설명하면서 얘기했던 건데
정확하게 나와 있는 기록은 병사에
나와 있는 군율은
반 이상이 죽으면 전쟁이 끝나면 점고를 하거든요
반 이상 죽었으면 나머지 다 참소합니다
말도 안 돼 굳이? 실제 그랬어요? 아니면? 실제로 그랬죠
그렇지 않으면 이게 단결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만약에
이들을 이끄는 깃발을 들고 있는 대장이 있어요
대장이 죽으면 다 죽입니다
네 목숨을 거의 나누는 한 팀
그럼 정말 죽기 살기로 같이 단합을 해야 되겠네요
그럼요 네 근데 좀 불공평한 게 원항진 10명,
12명 가운데서도 싸움을 지지리도 못하는 멤버가 하나
꼈다
그러면 그러면 사실 너무 위험하잖아요
고문관이라고 하죠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또 마찬가지로 이제 병서를 보면요
인원을 어쨌든
최대한 우리가 조직적으로 효율적으로 써야 되니까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그래서 일단은 좀 덩치가 작고
몸이 유연하잖아요 등 폐수를 시켜요
그리고 몸이 크고 막 우람한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낭선수를 시킵니다
그리고 장창수는 막 뼈심 세고 어떤 체력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장창수를 해요
긴 창을 막 계속 써야 되니까
그 당파수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좀 노련하고
눈에 살기 있고
좀 이렇게 침착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평소에도 약간 박금수 박사님 같은 스타일인가?
저는 좀 이렇게 화병 쪽이라고 그런가요? 그랬나요?
저같이 약간 정확히 나와 있는 걸 말씀드리면
사람이 용렬하고
녹록하여 남의 밑에를 들기 좋아하는 자는
그런 사람도 있지
아까 말씀하신 싸움은 좀 못하고
그런 사람들은 취사병을 시키는 거죠
화병을 시켜서
평상시에는 먹을 걸
들고 다니게 하는 역할을 다 맡겼던 겁니다
이게 체계적이네요
그렇죠? 네, 사람을 쓰는 방식이니까요
훈련도감 이후에 조선군은 좀 강해졌을까요?
사실 처음에는
너무 우리가 외에한테 오합주를 당했었잖아요
이후에 변화가 있었나요? 네, 그럼요
특히 훈련도감에서는 사실 살수 얘기를 많이 드렸는데
포수가 굉장히 중심이 됐었어요
그래서 뭔가 투항한 외군들로부터 조총술,
그런 것들을 다 만드는 법까지 다 익히고
그리고 또 이런 사격술 연습을 많이 해서
나중에는 조선의 포수가 요청돼서 저기 나선정벌도
청나라에 모집 챙겨서 어쨌든 억지로도 가게 되고
딱히 좀 빠른 편인 것 같아요
사격이나 활쏘기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잘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이제 살수들이 또 훈련을 받아서 포수와 살수
그리고 사수가 합동 전술을 펼치는
그런 전술이 완성됐고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조명연합군이
이렇게 육지에서
일본군들을 남해안까지
밀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훈련도감이 좀 진작에 설치가 돼서
이렇게 군사훈련을 시켰더라면
임진왜란을 그렇게
우리가 처절하게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생각도 드네요
자,
지금 무인들의 역사 얘기 좀 흥미진진하게 들어봤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이 훈련도감이
또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이 굉장히 많다면서요
훈련도감 그리고 여기 지금
우리가 있는 훈련원 이 하도감의 역사로 인해 가지고
바로 지금 그가 있는 이곳으로도 제일평화시장이라든가
이런 의류시장의 흔적들을 바로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의류시장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사실 이 무인들의 역사하고
지금 동대문 일대에 있는 이 시장의 역사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 무인들이 뭘 하셨길래
시장이 또 이렇게 연관이 됐을까요?
우리 역사에서 보면
1894년에 흔히 갑오개혁이라고 하는데 이
갑오개혁으로 인해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이 거의 완전히 폐지되고
또 상인들의 어떤 신분
차별도 많이 해소가 되면서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요
그런데 특히
동대문 일대에 많은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데는
바로 여기에 훈련원하고
하도감이 있으니까 군인들이 많이 있잖아요
군인들은 우리 지금도 그렇지만 군납이 되게 편해요
아무래도 옷 같은 거 예,
그러면 군인들한테 이제 보급해야 할 이런 옷들
그리고 또 여기에다가
군인들은 월급도 일부 옷으로 받는 경우 있어요
퍼로 받는 그러다 보니까 이 옷의 이제
옷감을 보급해야 할
이런 시장이 이곳에 있으면 훨씬 유리하겠죠
네 그런 인연으로 인해 가지고
상당히 일대 시장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또 1899년에 이곳에 전장
아나운서도 잘 모르실 거예요
저도 사실 전차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데
서울에 전차가 생겨요
저기 서대문에서 동대문
그리고 이 종점이 청량리 쪽인데
여기가 상당히 그런 어떤 전차 교통의 요지예요
전차면 외국에 있는 트램 말씀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죠?
전차라고 완전히 달라요
지상으로 가는 미스터
선샤인에 나오는 전차 말씀하시는 거죠?
그 시절 드라마니까
서울역사박물관에 가면 옛날 전차하고
앞에 있죠 전시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그러다 보니까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까
또 이곳이 상당히 옷감이 유통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 의류 시장이 이곳에 계속 모여들기 시작해서
마침내 1970년 무렵에는 이 동대문 일대 종합시장이
그것도 의류를 거의 전문적으로 하는 동대문
종합시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아까 이게 훈련 도감, 훈련원 장소였고
여기에 필수적으로 오는 게 군인, 군납
그래서 의류 산업이 발달하는 지금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대표 디자인 산업의 메카가 되는 게
역사적인 어떤 연결고리, 흐름이 있네요 있죠 재밌다
제 옷을 좀 보세요
이것도 역시 동대문에서 제작된 하지만
여기서 유통은 충분히 될 수 있는 패션
리더가 무예 별감이라고 화려하잖아요
벌써 별감이 가장 화려하게 입고 다녔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하도감터에서 어렸을 때
무예 훈련을 받아가지고 국왕 경호실로 들어가는 거죠
무예청이라는 건데
우리나라 군사 의복들이요
당시로 치면 패피였던 거예요
굉장히 사람들이 패피 화려하고
패션 피플 굉장히 멋있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여기가 지금 두산 두타가 있고 밀리오레가 있고
이게 98년 99년도에 제가 알기로는 세워진 건데
저희 학창시절에는 여기가 정말 옷 사 입으러 가는 곳
밤에 야식 먹고
싸게 좋은 옷을 구입해서 패션을 선도하는 그런 장소로
저희는 굉장히 많이 기억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그 이미지가 분명히 남아있고
교수님은 그걸 좀 많이 누린 세대인가요?
저는 오래 살았던 세대이기 때문에
저는 두타나 밀레오레 이거보다도 동대문의 평화시장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대학생 때 이곳에 옷을 사러 왔어요
근데 지방 출신
남자 대학생이 이곳에 와서
옷을 살 정도로 이곳의 명성은 대단했고
또 제 기억으로도
이때 새벽에 정말 이곳에서 지방에서 올라와서 옷을 떼서
이렇게 팔러가는 이런 사람들도 엄청났던
그것도 지금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고 DDP
여기 건설하면서 많은 분들 기억에서 좀 멀어지긴 했는데
그때 많은 갈등들이 있었어요
사실 DDP 건물은 자하 하디드라고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굉장히 유명한 건축가예요
왜 뉴욕의 허드슨이라든가, 그거 다 건축, 설계하시고
지금 중국의 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하디드 작품들이 굉장히 많을 정도로
지금 딱 봐도 진짜 멋있잖아요 그렇죠?
미래에서 온 우주선 같고
근데 여기서 하다 보니까
이제 여기 DDP를 건설할 때
많은 문화 유적들이 나와서
이거 건설을 좀 중단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게 과연 올바른 방법이냐
그때 논란이 굉장히 많았었어요
교수님도 그때 사학자로서 많은 이런 얘기를 들으셨겠네요
아무래도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가장 원칙은 원래 있던 자리,
원형에 복원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여러 가지 환경이라든가
조건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죠
지금 바로 여기
동대문 DDP에서 조금만 내려가다 보시면
서울에.. 소위 말하는 남소문에 해당하는 문,
광희문이라고 하는데
광희문도 사실 위치가 약간 바뀌었어요
광희문이요? 광희문
그리고 또 저쪽의 회화문 같은 경우도 서울의 동서문인데
거기도 역시 대로 지나가는 그것보다는 약간 더 북쪽에
이렇게 복원을 해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차선책으로나마
그래도 가장 원명이 있는 인근에 이것을 기억하게 하자
이런 방식으로 지금 진행이 되고 있고
그래서 앞에서도 잠깐 소개했지만
여기도 원래 우리 저 뒷편에 있는 한양도성
성곽 같은 경우도
한양도성 성벽이 가리켜 보이는 그 모습이 일부입니다
그 흔적들이 꽤 잘 남아 있는데
그것도 더 원래 원형대로 복원을 하려면 더 높아야 돼요
박홍수 박사도 소개하셨지만
여기가 이제 지대가
특히 낮기 때문에 성벽을 더 높이 쌓아야 되는데
높이 쌓아버리면 주변 환경하고 맞지가 않는다
DDP를 다 가려버리니까
또 그래서 여러분
항상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여러 가지
건물들과 이런
또 전통의 역사와 문화유적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방안으로 서로 좀 어떻게 보면 절충안이죠
그렇게 지혜를 좀 잘 모아서
그런 어떤 역사성은 우리가 잘 기억을 하면서도
또 이런 지금
또 현재를 살아가는 또 우리의 삶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이런 방식으로 해나가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기 이간수문부터 쭉 이어지는 성곽 보면 여러분
한양도성길을 걷다 보면요
도성 성곽의 색깔들이 다 달라요
그리고 벽돌, 돌의 모양도 다 다르고
이게 다 역사가 축적된 모습 그대로인데
이게 좀 아쉽네요
이거보다 훨씬 높아야 되는데
어떤 현대와 과거의 조화를 위해서
조금 과거가 양보를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우리 풍납토선 가서도 보면
백지 유물들이 그렇게 또 많이 나왔었잖아요
올림픽 때 거기 경기장 찍고
이러면서 거기도 어떻게 보면 지금 여기 동대문과 비슷한
그런 어떤 아픔과 고민을 갖고 있는 역사
현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어떤 과거와
미래가 가장 의미 있게 공존할 수 있는 고민,
우리들의 숙제가 아닐까 싶어요
네, 그렇죠 아까 말씀드린 대로
특히 동대문 지역은 조선시대 때는 훈련은 하도감이었고요
이제 근대 스포츠가 또 도입된 데가 바로 이 지역입니다
훈련원을 중심으로 해서 처음으로 우리가 야구대회,
축구경기 역사상
처음으로 했던 곳이 바로
이런 동대문 운동장으로 변하게 되는 거죠
물론 일제시대 때는 경청운동장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
이렇게 뭔가
그 역사들이 지금 DDP로 이어지고
켜켜이 쌓여있는 것 같아요
잠깐만 제가 예전에 이 지역 일대 발굴할 때
제가 두타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걸 왜 두타에 올라가서 왜 박금수 박사님이 찍으셨어요?
제가 한창 그때 군사훈련터 조사하고 있었는데
여기가 이제 발굴된다고 하니까
얼른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었죠
이미지 잠깐만 띄워주시겠어요? 이게 몇 년도죠?
제가 12년도로 기억,
11년인가 12년에 역사전 위에 올라가서 찍은 거거든요
역사전을 그날의 DNA가 그때부터 있었네
그러니까, 저걸 어떻게 또 찍을 생각을 했지?
잘 보시면 이관수문 보이죠?
어디 있죠? 아,
저기 있네요,
진짜 그리고 성벽길, 기단부가 앞에 드러난 거죠
그 전에 경성운동장 짓고, 그 이후에는 다 덮어있었는데,
파보니까 이게 나온 거죠
물길도 보이고,
이관수문 좀 보이시죠? 그렇네요
네 저기에 이제 어쩌면 물이 흘러가니까
목책도 남아 있었던 거예요
물이 나가니까 반대로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걸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목책으로 다 막았던 거죠
자 이렇게 이 동대문 운동장 이 일대 같은 경우에는
조선시대의 역사가 잘 정리된 곳이 동대문
역사관이 있어요
동대문 역사관에 가시면
우리 조선의 이 무인들이 썼던 다양한 무기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약간 용어가 어렵지만
기여신서, 병학진암,
군사 관련된 여러가지 서적들과 투구, 갑옷
이런 것들이 굉장히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보시면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이 있죠
또 우리가 근대 스포츠를 받아들이고
아까 말씀드렸던 저도 MBC
청룡 시계를 차고 다녔었는데
MBC 청룡 팬이었어요? 엄마가 사줘서 샀어요
조은정은 혹시 MBC 청룡 팬인가요? 저는 오비베였어요
그래서 MBC 청룡 팬들 되게 아 그래요?
저는 그냥 차고 다니는 거예요
시계에 그래서
또 근대, 현대 스포츠의 역사가 계속해서 쌓여온 곳입니다
잘 정리된 곳이 바로 경대문 운동장 기념관이죠
그래서 오늘날에는 또 패션 거리두기 되어 있지만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구나 라고
한번 생각하시면서 방문을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박금수 박사,
저거 아까 방금 찍은 사진 보고 상당히 감동을 했는데
그래도 진짜 두터 올라가기 힘들었을 건데
그곳에서 저 역사 현장을 꼭 남겨둬야 되겠다라는 사실
이런 발굴을 하고 있거나
공사가 진행 중인 이것이 어떻게 보면 더 의미가 있어요
완성이 되고 났을 때는 계속 가지만
그 상황은 아주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에 좀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어떤 우리
지금도 보면 지금 서울 공사에서 광장의 육조거리라든가
이런 거 지금 발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그런 현장 같은 거
꼭 한번 이거는 또 복원이 돼버리면
또 현장을 찍을 기회가 없으니까
한번 그렇게 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라고 한번 권해드리고요
저도 이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을 되게 좋아해요
아무래도 제가 이제 어떤 살아왔던
그런 삶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래서 이곳에는 예전에
정말 국요야구의 엄청난 추억부터 시작해서
프로야구 개막이라든가
이런 여러 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라든가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행사
체육대회 행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진, 영상
그리고 관련 유물
그리고 이제 운동장 주변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리고 한때는 운동장이 잠시
풍물시장으로 활용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변화 과정을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을 바로
이제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에서 잘 전시를 하고 있으니까
이곳을 찾을 때는
꼭 이런 현장들도 탐방을 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서울 운동장이었을 때
동대문 운동장에서 야구 같은 거
직접 관람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저도 이제 동대문 운동장에서는 보지 못했고
저는 그 당시까지는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국외야구는 주로 봤고요 이 프로야구
우리가 사실은 1986년 아시안게임하고
88올림픽 데뷔하기 위해서
잠실에, 우리 지금 가면 잠실운동장이라고 하잖아요
잠실에 종합운동장이 세워지게 되면서
이곳을 원래는 서울운동장이었어요
그러다가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제 바뀌기 시작했고
그래서 저도 동대문 운동장에서 고개하고는 제가 그때
고등학교 때는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봤어요
진짜 이렇게 왜 한 3대에 걸쳐서
이렇게 나들이 나오시면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이 동대문 일대의 이야기들
또 아빠 세대에서 옷 사러 왔던 이야기들
그다음에 아이들은 그런 얘기
또 즐겁게 들으면서
또 여기서도 새로운 추억을 쌓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대문 역사관도 좋고
또 동대문 운동장 기념관도 좋고
한번 요즘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오늘도 지금 산들산들 바람 불고
정말 제일 좋은 가을 날씨에 훈련도감
그날 토크쇼를 좀 진행해봤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심영진 교수님
그리고 박금수 박사님
여기서 좀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해 주신
또 유튜브 시청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또 좋은 기회에 다시 뵙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