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 최욱의 걱말서] 80년 서울 회군때 뒤바뀐 광주와 서울의 운명 (f.역사학자 전우용)
좀 어렵네요 어려웠을까요? 제가 좀 무식했죠
정영진 씨 모르면 좀 물어봐요
나만 무식한 거
좀 학살의 장소는 광주가 아니라 서울이 되었을 거예요
저는 이제 숭고함이 정영진 씨
마음에도 좀 와서 닿아야 될 텐데
갖고 있는지 모르겠네 네 최욱 씨 오월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월 하면은 천구백팔십 년 오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두환은 내 손에 혼납니다 못했잖아요
아직까지는 못했죠 죄송합니다 이제 40주년이 되는 해죠
그래서 서울시
그리고 광주광역시가 5월 평화 페스티벌 서울의 봄
광주의 빛이라는 슬로건으로 공동 개최를 한다고 하죠
그래서 5 .18 민주화운동
5월 항쟁 40주년을 갖는 의미에 관해서
오늘 좀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요
오늘 아주 화려하네요 출연진이 그렇습니까?
역사학자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분입니다
네 모두가 다 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저만 인정을 안 합니다
지금 목소리 잠깐 나오신 역사학자
전우영 교수님 나오셨고요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5월 평화페스티벌 5 .18
40주년 서울기념위원회 사무국장이신 유사원
예술감독님도 함께하십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사원입니다
이름이 조금 아쉽네요
그런 말씀을 많이 듣고 뭘로 했어야 돼요?
유올? 아니 유사원이잖아
진급이 안 되잖아 사원 아 대리?
하지만 이번에 감독님입니다
감독님 전우영
교수님은 굉장히 바쁘신 와중에 나오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뭐 특별한 역할을 맡으셨나 보군요? 아니요
전혀 안 맡았습니다
그렇진 않습니까? 지금 여기 나온 게 유일한 역할입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도움 말씀
좀 아마 주시러 나오신 것 같고요
일단 도움 말씀 두 분이 오셨으니까
5월에 대한 이야기를 좀 여쭤보긴 해야 되겠죠
그렇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은 없겠지만
그냥 대충 느낌으로만 알고 있지 않습니까
40년 된 얘기니까 그렇죠
전우영 교수님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일단 말씀을 해 주시고
5월 민주화운동의 개요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사실 역사학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일반 시민들 역시
한 10주년 정도 단위로 기억을 새삼 쓰셨습니다
가져가죠 올해가 일본의 한국강제병화 110주년,
그 다음에 한국전쟁 70주년, 4 .19
60주년,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주년이 값지는 게 굉장히 많아요
각각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들을 지금 다져봐야 되는데
6월에 또 한국전쟁 70주년 이야기 나올 것고
또 8월이나 9월쯤 되면 또 강제병화
110주년 이야기 나올 것고 코로나 확산 때문에 4
.19
60주년, 그냥 좀 가볍게 넘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각각의 주년들의 가치랄까요?
또 우리가 되새겨야 될 정신이랄까요?
이런 걸 따져보자면
아무래도 강제병합은 자주독립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겠죠
또 한국전쟁은 무엇보다도
평화에 대한 평화의 소중함을 따지는 계기가 될 겁니다
4 .19 60주년하고 5
.18 민주화운동
40주년은 합쳐서
모두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보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그런 사건일 터인데
조금 다르다면 또 심각하게 다르다면 4
.19가 민주주의의 형식의 문제
또 민주주의를 하나의 계몽담론으로 생각하던 시점이었다면
40주년을 맞는 5
.18은 민주주의의 실질의 문제
민주주의의 주체의 문제
누가 민주주의를 만들고 누가 누릴 것이며
누가 지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아주 근본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요 5
.18이 다 아시다시피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인데
79년 10월 26일
유신 독재의 중심이자
상징이 있던 박정희 씨가 사망한 날이었죠
그 이후로 굉장히 오랜 세월 동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던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타올라서
그의 봄쯤에는 전국의 중심이었던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굉장히 높아졌었고요
특히나 유신의 상징
심장부가 무너짐으로써 유신체제가 종말을 구하고
곧바로 민주화가 진행될 민주화 과정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12
.6 이후에 서울에서 굉장히 뜨거운 열기가 있었습니까?
한동안 개염때문에 12월까지는 안 그랬는데
그 봄에 3월, 4월부터 대학가에서부터 먼저 민주화
일정이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
가다가는 다시 또 유신 독재가 재현될 것이다
라는 두려움,
그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상태에서
실제로 신군부가 12월
12일 이후에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화 일정을 지키지 않고, 지키지 않는다기보다는
민주화에 의지가 없었던 것이예요
전혀 없었고
권력을 어떻게든 재편해서 유신
독재 제재를 이름만 바꿔서 연장할 것인가에 대한
그런 행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재야 또는 학생들 중심으로 해서
민주화 일정을 빨리 지켜라
신군부는 손을 떼라 라는 요구를 하면서
봄철 내내 여러 차례 시위를 반복했었죠
그랬다가 유명한 서울역에 백만학도가 모였다가
서울역 해군이라고 부르는 철수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다음 다음 날
당시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17일입니다
다음 날부터 광주에서 비상계엄 철회
민주화 일정 제대로 진전시켜라
또 비상계엄과 더불어 구속되었던 김대중
석방 이런 것들을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서울역 해군은 진짜 심재철 대표가 천봉이 있었습니까?
전체 각 대학 연합 학생회 회장들의 회의가 있었고
주도를 했던 사람이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씨였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전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겠죠
또 당시에 대학 들어가서
선배들한테 겪었던 이야기로는
굉장히 두려움에 휩싸여 있긴 했었어요
다른 학생들도? 학생 전체가 많이 모여있기는 했지만
얼마나 무섭겠어요 학생들만 모여 있을 뿐이고
일반 시민들은 아직도 주저하는 상태였고
당시 서울역에 모였던 수많은 학생들의 구호는 민주시민
동참하라 시민들도 굉장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거죠
아직도 불안해 있었던 상태이고
그런 상태에서 서울역 해군이 이루어졌고
이게 이제 좀 만만하게 봐도 되겠다 싶었던 것인지
군군이 곧바로 권력장악 절차에 들어갔던 거죠
여러 곳이 있는데
전국적인 시위가 있었어요 아닙니까
근데 왜 하필 전국적인 시위라고 보기 어렵구요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가
흐름이 서울에서 1차 서울역 개관으로 끊기고
신군부가 쿠데타에 해당하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재행하게 되니까
그에 대한 저항이 광주에서 먼저 일어났던 것인데
뭐 이거 뒷부분에서 사실 말씀드려야 될 것 같긴 한데
발언의 양이 거의 독재거든요
우리 유사원 감독님 시계를 6번 보고 있습니다
그럼 뒤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그러면 우리 감독님께서 5월 평화 페스티벌
여기에 대한 개요라든지
의미를 좀 짚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하게 됐고
왜 하게 됐느냐는 질문이
그리고 더불어서 왜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평화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굉장히 많이
그럴 것 같아요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얘기해 주셨지만
내용 주신 내용 중에 실질, 주체,
그다음에 누가 지킬 것이냐라는
그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누가 지킬 것이냐라는 걸 좀 더 뒷면을 보면
세대교체라는 게 지금 40주년에는 이루어져야 된다라고
서울시와 강주시가 같이 공감을 형성한 바가 있는 거죠
세대교체를 해야 된다라는 거는
결국 이 강주의 이야기가 5
.18이라는 이야기가 광주만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고
전국화가 돼야 되고
또 세계 시민과 함께 이겨야 된다라는 그 지점을 가지고
저희가 확대하자라는 큰 목표 아래서 이 사업을 5월
평화 페스티벌이라고 명제를 했고요
서울에서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게
가장 그 내면의 이야기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같이 무식한 사람들을 위해서
결론적으로 페스티벌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겁니까?
간단하게 딱 와닿게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건 제 사견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셨던 행동하는 양심 말씀
주셨잖아요 5월 평화 페스티벌이
그리고 서울에서 하는 이유는
이제 행동하는 페스티벌이
평화에 대한 주제를 조금 얘기해보고자 하는 거거든요
행동하는 평화요? 좀 어렵네요 어려웠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의식해서 조금 끼어들게요
감사합니다
최근에 공개된 당시 계엄군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특전사 대원들도 서울로 파견됐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광주로 이동이 된 거죠
이건 무슨 얘기냐면
5월에 대학생들의 시위가 5월
15일에 끝나지 않았더라면 철군하지 않고
그 다음에 5월 16일, 17일까지 이어졌더라면
학살의 장소는 광주가 아니라 서울이 되었을 거예요
이건 다른 말로 하자면
서울 시민들이 광주 시민들에게 빚을 진 거예요
이거는 같은 맥락에서 진행됐던 일이거든요 이 일은 단지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7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이고요
그 유신체제를 계속 지키려고 하던 세력과
유신체제를 종식
그리고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 전선이었어요
그 전선은 국내에서 이루어진 민주화 운동이었기 때문에
중심 전선이 서울이 될 것이냐
광주가 될 것이냐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단히 우연적인 사건에 따라서 갈린 것뿐이지
사실은 같은 맥락에 있었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문제는 서울이냐
광주냐를 따질 것이 아니에요
유신체제의 종식을 바랐던
모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사람들과 그 민주주의를 짓밟고
사적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집단들 사이의 싸움이었었고
그 싸움에서
광주 시민들이 가장 용감하게 가장 앞서서 나갔기 때문에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것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서울과 광주가 일단 연대하지만
사실은 서울과 광주의 연대가 아니라 민주주의대
반민주 세력 간의 전선이었고
이건 서울 광주를 따릴 일은 아니었던 것이죠
광주의 그 비친 마음을 우리가 좀 가져야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서울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광주 시민들에게 빚을 진 거예요
그런데 그 빚을 제대로 갚기는 커녕
그 이후에도 굉장히 오랫동안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그런 일들이 굉장히 오랫동안 반복됐죠
그러니까 5월 동안에
광주 시민들은 사실상 여론에 차단된 상태에서
또 언론조차도 무슨 폭도니
아니면 안동이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상황에서 여론으로도 고립돼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고립돼 있었고
그리고 그 고립 상태가 결국 전두환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그 이후로 10년 넘게 지속됐어 그렇죠
이념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또는 문화적으로나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전국적 왕따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죠
그것에 대해서
이제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빚을 서울 시민들 먼저
일단 갚자 이게 좀 중요한 생각일 것 같아요
이제 좀 맥락이 잡히네요
그러면 그 빚을 갚는 그 행사에
어떤 프로그램들로 빚을 좀 갚으시는지
감독님이 좀 설명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빚을 갚으려면
굉장히 많은 콘텐츠와
시민들과 만나는 접점을 만들어야 되는데요
사실 작년부터 이 행사를 지금 준비를 했고
굉장히 많은 콘텐츠들이 놓여 있는데요
가장 큰 거는 5월 문화재,
그 다음에 서울과 강주가 이뤄내는 협력사업, 참여
프로그램들로 저희가 구성을 했습니다
평화의 장, 공감의 장,
이제는 새로운 증언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 거예요
새로운 기억을 저희가 다시 아카이빙을 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기억의 장으로서
콘텐츠로 구성을 하고 있었고요 이 행사들이 코로나라는
굉장히 안 좋은 사태와 만나면서 시민들하고
정말 한 공간에서
문화 난장으로서
하고 싶었던 지점들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놓이게 됐고요
시소를 할 것이냐,
이거를 아예 축소하는 버전으로 갈 것이냐
굉장히 많은 갈등이 있었고
그 안에 또 숨은 고민들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주년이 갖는 의미는 올해 또 해야 되니
그래서 온라인 콘텐츠로 많이 전환이 돼서
많은 부분들을 시민들하고 만나려고 하고 있죠
아쉬운 부분이 좀 있겠네요
그런데 또 역으로 보면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도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죠
어떤 행사들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 몇 개 소개를 해주신다면
뭐 있습니까?
컨텐츠가 너무 많아가지고요
그래도 꼭 보셔야 된다는 컨텐츠를 말씀을 드리면
14일부터 네이버랑
생중계를 진행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고요
그 컨텐츠들은 5월 음악
5월달의 그 상황을
저희 1987이라는 영화를 보셨을 거예요
그 컨텐츠와
좀 비슷한 흐름의 음악극이 준비가 되어 있고요
뮤지컬이라고 보면 될까요?
뮤지컬하고 음악극은 좀 다르죠
죄송합니다 정혜인 씨 모르면 좀 물어봐요
나만 무식한 거 좀 드러나게 하지 말고
그걸 드러내서 뭐 하려고 음악극에는 김덕수
영희님이 출연을 좀 해주시고요
그리고 3월 노래
현대무용의 굉장한 지금
평판을 받고 있는 LDP무용단하고요
국악공연 양상불, 신하이라는 팀이 출연을 해서
그 시대의 스토리와
그 시대의 아픔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고요
네이버 TV로 누구든지 볼 수가 있다는 겁니까?
그렇죠 5월 평화 페스티벌을 치시면
그게 바로 연동이 돼서 그 콘텐츠를 만나실 수가 있고요
16일에는 클래식으로 만나실 수 있는데요
말러의 부활이라는 가장 슬픈 그 곡을
구자범 지휘자님이 소규모로
사실은 이 콘텐츠가 가장 큰 콘텐츠였는데
518명의 시민
오케스트라를 구성을 해서
서울광장에서 큰 울림으로서 좀 만나고 싶었는데요
시민분들이 굉장히 많이 신청을 해주셨고
굉장히 많이 참여를 해주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건 안 될 것 같아 이건 안 돼
그래서 그 콘텐츠는 좀 사그라들었고
그래서 작게나마 복들로서
조금 소규모로 만나실 수 있고요
그거는 16일 날 8시에 저희가 진행을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17일 날 KBS 열린음악회가 5
.18이라는 주제로 저희가 5월 5일 날 촬영을 했고요
그래서 그렇게 또 준비가 되어 있고요
18일 날은 몸의 언어라고 할 수 있죠
춤으로 만나는 5
.18을 만나실 수 있으면 된대요 5
.18은 기억은 하시지만
5월 27일은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5월 27일은 또 뭐죠? 부활절이라고
이거 한번 짚어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우리 교수님
5월 27일
계엄군이 5월 18일 들어와서부터 과잉 진압,
굉장히 난폭하고 폭력적인 진압을 하면서
광주 시민들의 자구적 무장 저항이라고 하는 것
사실 계엄군도
사태가 그렇게까지 벌어질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일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를 했었어요
그래서 일주일 가까이
광주 시민들의 이른바
광주시 자체를 자치적으로 관리하던 시대가 봉쇄는 했지만
봉쇄 상태에서 있다가 5월 27일에 계엄군이 재진입하죠
광주도 전남도청의 마지막 저항세를 드립니다
거의 몰살당하다 시켰던 그런 큰 사건이죠
마지막 날이군요
철수하라는 방송에도 불구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모두 강제 진압하고
사살하겠다라고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광주의 정신을 지키겠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텐데도
그 와중에 이미 죽을 걸 알고
광주에서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이 광주의 정신,
이것이 사욕이나 사사로운 정치적 욕심이나
이런 것들이 섞여 있었다면
자기 목숨을 죄송한 질문입니다만
마지막까지 전남 도청에 남아있던 분들은 학생입니까?
학생도 있고요
일반 시민도 있고요
진짜 그냥 평범한 시민입니까?
제 대학교 동기 중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거기 있다가
선배들이 너는 고등학생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해서
울면서 나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거기는 그야말로 마지막으로 자기 목숨을 던져서
우리가 했던 일이 지난 일주일 넘게
광주 시민들이 했던 일이
그저 무슨 사적인 정치적 욕심이라든가 뭐가 되겠다거나
이런 것이 아니다라는 걸 죽음으로써 입증한 것이죠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죽을 걸 알고 그 자리를 지켰어요
그리고 죽었어요
그럼 그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냐?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다라는 걸 입증한 것이죠
그 행위로써
그래서 지금 감독님이 부활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그 부활은 광주 정신의 소생인 것이죠
그게 광주를 끝없이 살아있게 만드는 죽을 줄 알면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의 죽음의 기억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의 기억으로서 살아있게 만드는
그런 행위가 됐던 것이죠
저는 이제 숭고함이 정영진 씨
마음에도 좀 와서 닿아야 될 텐데
닿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니 저렇게 정말 위대한 분들
이름 한 명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것도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저는 아마 그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내기 못하죠
아마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마지막 지금까지 그렇게 불살랐던 숭고한 의사분들
몇 명쯤 될까요?
지금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기리고 있기로는
굉장히 많죠
그런데 한 20여 분, 당시
전남 대학생회장을 했던 분들이라든가,
문재원 씨라든가 많은 분들 기리고는 있는데
전남도청 쪽은 대부분 명단이 공개됐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가셨던 분들
좀 생각해 보시면 되고요
또 그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우리가 5월만 되면
부르는 노래가 영혼결혼식장에서 결혼식 때 불렀던 이문희
원행진곡 이런 것들도 만들어져서 불렸고요
그런 것들도 이 프로그램에 예를 들면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한 40년 지났으니까
또 지금분들에게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라든지
이런 노래 같은 것들도 좀 많이 있겠죠?
노래와 더불어서
아까 전에 춤 얘기 좀 무용 얘기하다가 좀 알았었는데요
저희가 무용 공연 안에 관객분들이 못 오시니까
무관객으로 진행하는 상황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공연을 헌정하겠다는 마음으로 5
.18 기념재단
그리고 유공자 망울동 묘지에 묘비
이름이 적혀있는 분들의 리스트를 받았어요
받은 리스트가 지금
저희가 갖고 있는 게 총 800분이거든요
사망자가 한 800분 정도 된다는 리스트가 있어서
그분들의 이름을 저희가 객석에 모두 이렇게 써서
이렇게 좀 붙여놓고 좀 숭고한 마음으로
그들을 좀 위로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진행을 하려고 하고 있고요
행사는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온라인 콘텐츠로는 6월 마지막 날까지 보실 수 있고요
그 이후에는 아카이빙 돼서
또 내년에 준비하는 5월 평화
페스티벌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이버에 들어오셔서 편히 그냥 5월 평화
페스티벌 치시면
콘텐츠들은 수시로 좀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18 TV라는 곳도 있군요 5
.18 TV라고 제가 지금 이름을 지었는데
거기에 저희 홈페이지 이름이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51840주년
기념위원회 안에 굉장히 많은
그 당시를 사셨던 때를 기억하셨던 분들이
총 127분의 기획위원님과 고문들을 저희가 모셨어요
그래서 그분들의 518의
그 시대의 40년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저희가 릴레이 영상 응원 영상을 제작을 했거든요
그 이야기는 정말 그 시대의 이야기거든요
본인이 겪었던 이야기와
그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뱉어내 주셔서
저희도 그걸 스크립트 하면서 눈물 날 때도 있고
정말 이때 그 상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하는 놀람도 많이 경험을 했고요
그 콘텐츠들은 저희가 짧게 제작이 됐기 때문에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감독님한테는 좀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이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좀 허탈하게 느껴지는 게 이 5
.18의 수계는
지금도 너무 잘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좀 허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네요 교수님
제 마음을 좀 달래주시죠
저도 허탈한데요
조금 전에 제가 말씀 잘못 드렸어요 윤상원 씨고요
역사학자가 이런 실수를 하면 안 되는데
유명한 이물의원 행진곡
영혼교른식의 주인공이었던 분이기도 하고
그건 좀 그렇고요
그런데 사실은 이 전두환 본인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우리 사회가 이 사건의 의미
또 이 사건의 전체 경과에 대해서 인식을 같이 하고
당시 전남도청에서 희생됐던 분들
광주에서 희생됐던 분들에 대한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같이 가지면서
당시 그 학살을 저질렀던 사람들에 대해서
법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제한되어 있다
하더라도 또 의식적으로 단죄하는데
마음을 모은다면 덜 허탈할 것 같죠
정말 허탈한 건 이제 거꾸로잖아요
오히려 전두환 편을 들고
여전히 광주 시민들 내부에
북한에서 침투시킨 북한군이 들어가 있었다는 등
아니면 당시 빨갱이들이 주도한 일이라는 등
이런 얘기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세력을 얻고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저는 이 문제를 정말 우리 사회가 정리하는 것이 전두환
개인에 대한 처벌 여부를 떠나서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사회 내에 이 광주의 희생자들을 3차 욕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좀 고쳐줄 수 있을까
그들의 병든 의식을 고쳐줄 수 있을까
이거 고민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두환 씨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그런 목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반대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전두환 같은 사람이 잘 사는 거 아니에요?
뭐가 제일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29만 원
이후로 벌었다는 돈은 없잖아요
그렇죠? 볼 이유가 없어요 돈이 많은데
그런데도 잘 살고 있다는 건
누군가 계속 도와주고 있다는 얘기겠죠
아직도 의전이 대단하더라고요
저는 정영재 씨 얘기에 조금 더 동감을 합니다
전두환 개인이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기보다도
사실은 우리가 전두환과 광주를 얘기를
하지만 이 광주에 피를 딛고 나서
그렇게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서 권력을 잡고 나서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는가
그 권력을 통해서 어떻게 얼마나 복수했는지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를 하고
또 이런 것들을 경제력으로 쌓아올려왔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연구가 안 돼 있어요
이른바 신군부라고 불렸던
전두환과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이 어떤 포상을 받았고
그 포상으로 얼마나 재산을 불렸고
그런 것들이 지금
어느 정도의 물적 기반으로 형성돼 있는지
이거 제대로 아직도 연구를 못했거든요
이런 것들이 되고
나야 이른바 전두환 세력이라고 하는 것들이 드러나요
그것이 왜 여전히 힘을 가지면서
여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것까지 알 수가 있을 터인데
아직도 우리는
그래서 광주 문제에 대해서 194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역사적 단절을 할 수 있을 만한 자료적
학문적 근거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거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이게 이를테면 그런 거예요
우리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됐잖아요
해방이 됐는데도 7
.1파들의 재산 환수법이 생긴 거는
그러고 나서 60년 지나서였어요
그러니까 이건 재산
현수법 차원의 문제는 아닐 수 있겠지만
재산권이라고 하는 것과
정치적 과오라고 하는 것들이 함께 단주되지 않아요
이건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하거든요
역사학자시니까 이거 하나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DJ 당선인의 권유로 YS가 사면한 거 맞죠?
그거는 역사적으로 그래도 잘한 일입니까?
시대적 한계였다고?
우리 사회가
사실은 1980년 5월 27일에 끝난 게 아니다
그때 사람들이 사망함으로써
광주 항쟁이라고 하는 작은 단계는 끝났지만
그 이후 10년 넘게 광주는 여론으로서
사회적 담론으로서 말을 꺼내면 안 되는 단어였어요
말을 꺼낼 수가 없는 단어였고요
그 속에서 정권 주도에
또는 정권과 협력한 언론 주도에 광주
고립화 담론 전략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진행됐죠
80년대 내내 많은 정권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이 빨갱이들이
혹은 북한 간첩의 조종에 의해서
또는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게 알고들 있었어요
그렇게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시민사회의 여론 또는 시민
일반의 여론에 굉장히 강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전두환 사면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청산하지 못한 과거와의 불철저한 화해
이렇게밖에 볼 수가 없는 거였죠
과거가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려면
어쨌든 간에 타협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안 그랬으면 참
좋았겠다라고 사고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 조건에서는 그러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더 힘들게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옳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죠
그런데 당시에 그렇게 판단했던 분들은
당시 저야 굉장히 붕괴했던 그런 상황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황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이게 이렇게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다
국민 여론을 통합한다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정말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도 있겠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아
국민들의 여론이나
인식이 다 바뀌기 위해서는 뭘 하면 됩니까?
전 국민을 다 강제 교육시킬 수는 없을 거고
지금 40주년이기지만
최근에 굉장히 우리 사회에서 좀 두드러진
담론성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뭐냐면 선진국이라는 단어에 대한 재해석
최근에도 공영방송
공중파 TV토론 주제로도 나왔었죠
우리 선진국이냐라는 주제로 얘기도 했었고요
저도 그런 얘기를 몇 번 했습니다마는 굉장히 오랫동안
우리는 최근까지도 지난 여름에
일본에서 수출 규제를 단행할 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먹음국이다
자발적으로 자립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다
한국은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죠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는 것처럼
떠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지금 코로나 방역을 경험하면서
우리 국가가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하고
오히려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선진국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우리가 아시아에서 남들보다 두스러지게
선진성을 보여온 분야가 뭐냐
경제, 정치, 문화, 한류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이 민주화 운동만큼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두스러진
선진성을 보여온 영역이 없다고 생각을 해요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이 되었고
그리고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이 되어서
군사독재를 겪은 건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그래요
왜냐하면 식민지 하에서
문화 역량 자체가 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인도 육성이 안 됐기 때문에
이게 무역에 의한 군사 지배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
군부가 등장하는 것은 전 세계의 보편의 현상이었거든요
그 군부독재를 시민의 피로
시민의 의지로서 시민의 생각으로서 전복하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민주주의의 실질을 갖추어 놓고
그렇게 만들므로써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국민이 두려워지니까
방역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철저하게 되는
이런 긍정적인 선순환의 과정을 겪어왔거든요 이 점이
한국이 갖고 있는 대단히 두스러진 장점이고요
세계 내에서 올 수 있는 점이에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우리의 기억은 아니다
지금 이제 우리 감독님도 말씀하셨지만
이게 왜 세계와 함께 해야 되느냐
우리가 선진국 따라가자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그럼 그 선진국이 우리예요
이제 이제 우리야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이런 데서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들에서
어떤 나라를 모델로 할 것이냐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가 무슨 영국,
프랑스 모델로 못 따라가요 그렇죠
그런 나라들을 우리는 모델로 두어왔지만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식민지성이라든가
사회율성이라든가 자기 모멸감
이런 걸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가 가장 먼저 만들어냈어요 이
광주민주화운동은 거기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이것은 단지 일국사적
한국에서만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사건이 아니라
전 세계 식민지
피해 압박 상태에서
군사독재를 경험했던 사람들한테 하나의 빛이자
희망이 되는 사건이거든요
우리 감독님
그러면 5월 평화페스티벌 국제자를 하나 붙여야겠어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거는 오늘
아주 그냥 숙연한 분위기에서 정말
우리가 꼭 알아야 될 부분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 감독님 이 행사 곧 시작인데
우리 시민분들께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거나
서두에 제가 행동하는 평화 말씀드렸는데요
올 평화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약간 울컥했던 지점들이 몇 지점이 있는데
한 부분을 좀 말씀을 드리면
코로나 때문에 이 공연 콘텐츠는 내지는 참여
콘텐츠를 운영을 해야 되는데
정말 참여하고 있는 무용수들이라든지
연극 배우라든지 그분들에게 대부로 저희가 물어봤어요
이렇게 행사를 추진함이 있어서
주최 측에서는
온라인 콘텐츠로 전환을 해서 가고 싶긴 하나
정말 참여하는 분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참여할
의사가 있느냐라고 물어봤을 때 이 행사가 5 .18
민주화운동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들한테도
그런 울림이 갔는지 코로나가 걸릴 수는 있겠지만
걸리면 그때 빠지면 되니
꼭 동참해서 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적극적으로 또 동참을 해주셨고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하고
더 많이 잘 만들어서 사람들하고
더 같이 함께해야겠다라는 의지가 생겼고요
그런 의지들이 사실은
또 오늘의 이 자리에 와서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많이들 봐주시고 보시면서 평화가 이런 것이었나
그때의 그 기억들이 이런 것이었나라고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보는
저희 콘텐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참여하는 모든 분들도 다 준 의사들이야
행사에 참여하는 분들
그렇게 좀 기억을 해야 될 것 같네요
두 분 모시고 5월 평화 페스티벌 얘기를 좀 했는데
혹시 우리 교수님 못다하신 말씀 있으시면
잠깐 시간을 드릴까요?
못다한 말은 엄청 많죠
엄청 많으시기 때문에
다음에 또 나오시면
길게 또 한 번 역사적 의미를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함께해 주신 전우용 교수님
정말 유명하신 역사학자시죠
그리고 서울시 5월 평화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맡고 계신 유사원 감독님 두 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걱정 말아요
서울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들로 만들어지고 있죠
팟빵 채널 통해서 댓글 남겨주시고
서울골뱅이 팟빵닷컴으로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 더욱더 풍성한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이서울유!